봄에서 여름으로
“중요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다”
『가녀장의 시대』 / 이슬아 / 이야기장수/ 2022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해서 100% 현실 그대로일 것이라 믿지는 말자. 이것은 하나의 사회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고, 앞으로도 많은 과제가 남은 가족의 이야기다. 그 안에는 사랑과 이해, 배려와 성장의 순간들이 있기에 너그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작가 이슬아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한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문학의 범주를 넘는 그의 활동 영역은 기존의 시스템을 비틀어 숨 쉴 틈을 찾는 세대의 아이콘이라 볼 수 있다. 흔히 MZ 세대라 말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사회의 기초 단위로 가족이 있고, 그들을 먹여 살릴 책임을 지고, 그 권한으로 가족을 통솔하는 사람을 가장이라 한다. 흔히 그 역할을 가족 중 나이 많은 남자, 주로 아버지가 맡아왔으므로 아비 부(父)자를 넣어 가부장이라 했다. 슬아의 기억에는 할아버지가 그 역할을 했다. 그런데 모든 권력은 오래가면 부패한다더니, 아버지들이 통솔의 책임보다는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한 위계와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슬아의 물음표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사장이 되겠다는 생각, 그것이 엄마나 며느리가 되는 것보다는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슬아는 사장님이 되었다. 그리고 복희와 옹이를 직원으로 채용했다. 복희는 슬아의 어머니이고, 옹이는 아버지이다. 이렇게 세 사람은 가족이면서 고용 계약으로 얽힌 이중 관계가 된다. 그들이 일하는 출판사는 분명 패밀리 비즈니스지만, 이전 농경 사회와는 다르다. 고용 계약이 없던 사회에서 가족들의 기여는 가부장의 처분에 따를 뿐 개별적으로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가녀장의 역할을 궁리하는 슬아와 그의 고용인들 사이에는 새로운 운영 방식이 필요하고 그것을 습득해 나가는 과정을 다소 위트 있게 그리고 있다. 아직 미숙한 가녀장의 모습은 책의 표지에서 나타난다. 왕관을 쓰고 전자 담배를 휘두르고 있는 슬아의 모습은 기존의 전제적인 가부장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개혁을 주장하며 군림하지만 앞선 권력자의 횡포를 답습할 것 같은 신임 황제의 모습이다.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새로 등극한 가녀장이 아니라 평생 압박받는 신세로 살아온 복희다. 어려서는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받지 못했고, 결혼 후에는 집안 살림을 챙기고 가족들을 걷어 먹였지만, 그 노동을 인정받지 못했고, 자식들이라도 교육하고 잘 키우려 희생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다시 잘난 딸(가녀장)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니, 못할 일이다. 그런데도 슬아가 만드는 세상에 가장 협조적인 사람은 복희다. 작가라는 일에 힘들어하는 딸을 격려하고, 이해할 수 없는 친구들도 보듬어 주고, 때론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시트콤처럼 전개되는 이 작품의 모든 회차는 복희가 주인공이다. 때론 현실 세상과 작가의 세계가 불편하게 어긋나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그 틈새를 메우고, 다시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두 모녀간의 친절한 대화가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준다.
자기 집을 출판사 사무실로 사용함으로써 회사 업무와 가사 노동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업무 시간과 퇴근 이후를 정확히 구분한다고 하면, 슬아는 사장님이긴 하지만 가녀장이라 할 수는 없다. 많은 직장인들이 자기 회사의 사장이 자기 가족의 리더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사장이기 이전에 글을 쓰는 작가인 슬아는 직원들이 퇴근한 이후에 일을 하고 그 시간에 시중드는 것은 분명 야근이고 휴일 근무다. 회사 경비 지출과 집안 생활비는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 점심 밥값은 회사 비용이지만 저녁은 월급타서 생활비로 충당해야 한다.
결국 이 작품은 가부장의 시대가 가고 가녀장의 시대가 왔다는 것이 아니고,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항상 믿어 주고 같은 편에 서는 다정한 가족 이야기다. 단순히 혈연과 혼인으로 얽힌 관계로 가족을 정의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희생을 말하지 못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일 년에 한 번도 보지 못하는 아들보다는 수시로 찾아와 울고불고 떠들며 보듬는 친구가 더 소중할 수도 있다. 소설일 수도 있고, 생활 에세이일 수도 있는 이 책이 빛나는 이유는 바로 그 지점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많은 관계가 있고, 그것을 항상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복희가 있고, 그들을 지켜보는 웅이가 있고, 지나간 시간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슬아가 있으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헤게머니를 누가 갖느냐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며사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