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식주의자가 하루 한 번 샐러드를 하기까지.
나는 샐러드를 풀때기로 취급하는 육식주의자였다. 샐러드는 돈가스와 곁들여 먹는 정도의 음식이었다. 때때로 맛이 아닌 음식 낭비 방지 차원상 먹을 때도 있었다. 샐러드는 내게 딱 그 정도였다. 친구와 고기 뷔페를 갈 때면 우리는 불판 앞에서 선전포고를 했다. ‘고기로 배를 채워야 하니까 샐러드는 생략하자.’ 육식주의자를 넘어 육식열광주의자였다. 지금의 뼈와 살의 90프로 이상은 동물의 뼈와 살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내가 예전의 풀때기, 지금은 1일 1샐러드식을 하고 있다. 나는 샐러드를 버무림이라 부르고자 한다. (나는 본 글에서 샐러드와 버무림을 혼용해서 썼다.)
2019년 9월부터 페스코 식단을 유지해왔다. 6개월 정도는 버무림을 거의 먹지 않았다. 한식 위주의 페스코 식단을 꾸려 먹기 시작했다. 갈치조림, 고등어조림, 참치김치찌개, 된장찌개, 콩나물국, 두부조림, 마파두부밥, 야채볶음, 채소무침 등이 내가 주로 먹었던 식단들이다. 내가 과일과 채소, 견과류 버무림 1일 1식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지금도 간간히 고기를 먹고 있는 아내 때문이다.
페스코 채식을 시작한 지 6개월쯤 되었을 무렵, 주말이었다. 아내가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에서 샐러드를 먹자고 제안했다. 별생각 없이 따라나섰다. 계란이 들어간 콥 샐러드가 있고 새우가 들어간 새우 샐러드가 있었다. 정확한 가격은 기억이 안 나는데 10,000원 정도였다. 적양배추, 양상추, 올리브 등 갖가지 채소와 새우가 있었고 드레싱 소스를 뿌려서 먹을 수 있었다. 맛있었고 비쌌다. 채소와 새우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한 끼 식사가 가능하고 새우가 없더라도 샐러드로 한 끼가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비쌌다. 양이 적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10,000원이나 할 금액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 돈을 지불하기엔 억울했다. 먹고 싶은 채소와 과일들을 손질하고 입맛에 맞는 드레싱만 얹어서 먹는다면 집에서도 충분히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식비도 아낄 수 있겠다고 판단됐다. 방법과 비용은 해결되었고 자신감이 생겼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채소와 과일들로만 버무림 식단을 구성했다. 바나나와 양상추, 그리고 치커리와 사과로 구성된 버무림이었다. 마트에서 사계절 구할 수 있는 토마토는 버무림 구성에 항상 포함시켰다. 혹여나 부족한 영양소는 하루의 다른 끼니에 채운다는 생각으로 영양에 대한 부담을 덜었다. 부담을 가지지 않으니 꾸준히 1일 1버무림식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겨 ‘예쁘게’ 먹고 싶었다. 바나나의 누런색, 양상추의 연두색, 방울토마토의 빨간색. 뭔가 좀 부족해 보였다. 마트에 가서 채소 칸을 둘러보니 노란 파프리카가 눈에 들어왔다. 갖가지의 초록 잎채소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파프리카와 초록 잎채소를 넣어 먹었다. 하늘이 내려준 선물로 알려진 양배추도 곁들였다. 형형색색의 버무림이 완성되었다. 잘 꾸며서 플레이팅을 하고 나면 사진을 찍었다. 요리도 예술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마음을 담아 요리했다. 식사 전에는 고운 색깔의 버무림을 눈에 담고 신선한 채소들을 몸에 담았다. 행복한 식사 시간이었다.
1일 1버무림식을 오랫동안 이어나가고 싶었다. 영양학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버무림 식단을 만들어야 했다. 식단을 진단했다. 나의 버무림 식단에는 단백질과 지방이 부족했다. 채식을 하지 않는 이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문제였다. 단백질과 지방을 보충해야만 했다. 견과류로 지방을 보충했고 두부로 단백질을 보충했다. 하지만매 끼니마다 두부로 요리하는 건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에 간편하게 두유를 먹기 시작했다. 아보카도에도 지방이 많다고 하여 아보카도도 가끔 챙겨 먹었다.
나의 버무림 식단은 나날이 발전해왔다. 버무림으로 끼니를 해결하면 금세 배가 고팠다. 포만감이 적었던 탓이다. 냉장고 채소 칸을 둘러보았더니 포만감을 주는 채소들이 보였다. 단호박, 감자, 고구마. 단호박은 쪄서 아몬드와 함께 버무려 수제 단호박 버무림을 만들어 먹었다. 감자는 쪄서 설탕을 찍어 먹었고 고구마는 쪄서 먹거나 프라이팬에 튀겨 설탕을 묻혀 먹었다.
1일 1버무림식은 현재 진행형이다. 물론 하지 못할 때도 있다. 1일 1버무림식은 지킨다는 개념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채식은 수양이 아니다. 내게 버무림 식단은 자연스러운 식사이면서 최선의 식사다. 즐겁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건 한 끼 식사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점이다. 죽이지 않고 착취하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점에 안도하게 된다. 채식을 하기까지, 이렇게 버무림 식단이 자리를 잡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기를 먹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채식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즉 내 머리를 설득하는 일은 쉬웠다. 문제는 내 몸이었다. 몸은 오랜 시간 고기에 적응되어있었다. 머리는 거부했지만 몸이 고기를 찾았다. 그 몸을 바꾸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단번에 채식을 시작하는 건 기적과도 같다. 일련의 과도기가 없는 채식은 고통스럽다. 수양의 과정처럼 느껴질 수 있고 실패에 이르는 이들도 많다. 오랜 시간 천천히 고민하고 자신만의 방법을 찾는다면 채식은 고통도 수양도 아니다. 나는 이 글을 쓰는 현재 시점에도 가끔 물‘고기’를 먹는다. 머리로 이미 알고 있다. 물고기도 고기이며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걸. 페스코 채식을 시도했던 초기 과정처럼 몸과 마음을 설득하는 과정에 있다고 믿는다. 분명 언젠가는 지금보다 덜 폭력적인 식탁을 마주할 날이 올 것이다.
간혹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 되묻고 싶다. 그대의 식탁은 과연 자유로운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덧붙여, 채식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았으면 한다. 가끔 사람들이 채식을 풀때기로 천대한다. 면전에 대놓고 “풀때기로 배가 차냐? 고기를 먹어야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농담이라고 하기엔 예의가 없는 것이다. 육식을 하는 사람 면전에 대놓고 사체를 뜯어먹는 야만인이라고 하면 농담이 되겠는가. 버무림은 누군가에게 풀때기로 천대받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고 의미 있는 한 끼다.
버무림 식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콘텐츠
책 <요리를 멈추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The Game Chang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