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시절이 있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보이기만 하면 발걸음을 멈춰 책을 들춰보곤 하던 시절. 마음에 드는 몇 구절을 발견하면 책을 구매하곤 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장석주의 <사랑에 대하여>,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를 밑줄 쳐가며 읽었다. 문장을 곱씹고 소화하면 사랑의 전문가가 될 수 있었을 거란 기대 때문이었을 테다. 돌이켜보면 나는 왜 그리도 사랑에 집착했던 걸까. 실체 없는 문장을 붙들며 불안이라도 잠재우려던 노력이었던 걸까.
사랑받는 능력인가, 사랑하는 능력인가
에리히 프롬은 책 <사랑의 기술>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랑에 대한 오해는 사람들을 다소 이상한 방향으로 이끈다. 현대인들이 권력이나 부를 쌓고 외모에 치장한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사랑스러워지기 위한, 사랑받기 위한 현대인들의 잘못된 사랑이라고 언급한다.
20대 초중반의 나도 현대인 중 한 명이었다. 에리히 프롬이 책을 쓴 지 약 40년이 지난 때였지만 여전히 권력, 부, 직업, 인기가 사랑의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사랑 자체가 아니라 사랑의 부산물에 집착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사랑하기 위함이 아닌 사랑받을만한 인간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을까.
<사랑의 기술>을 다 읽고 난 뒤 깨달았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 사랑받는 '대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이의 '능력'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아니, 위로했다. 사랑의 기술은 사랑'받을' 능력이 아니라 사랑'하는' 능력에 달렸다는 걸.
사랑받을 능력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왠지 사랑하는 능력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는 사랑받을 자격이 아닌 사랑하는 근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던 것 같다.
보다 적극적으로 이별을 말하다
결혼 이후에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이따금 반응을 하지만, 예전만치 못하다. 얼마 전이었다. 시집 한 권의 제목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제목은 '사랑의 근력'. 지나칠 수 없는 제목이었다. 오래 전 에리히 프롬의 위로가 가슴 한편에 남았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그간 단련해 온 사랑의 근력 때문이기도 할 테다.
<사랑의 근력>은 김안녕 시인의 시집이다. 시인은 2000년에 등단하여 <불량 젤리>,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입니다>를 썼고 <사랑의 근력>이 세번째 시집이다.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이지 않은가. 사랑의 근력이라니. 사랑은 근력과도 같다는 건지, 사랑의 근력을 키워야 한다는 건지, '무언가' 때문에 사랑에 단련이라도 된건지. 알쏭달쏭해지는 제목이기도 하다.
미친 개한테 물린 셈 치라던 남자의 말이
이빨 자국처럼 남았다
-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한 번 쭉 읽은 후 시집의 잔상은 이러했다. '홀로 서 있는 이의 이빨 자국'. "미친 개한테 물린 셈 치라던 남자"가 실존하는 인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정도의 충격을 안겨준 이가 있다면 시를 쓰지 않고 배길수 있을까.
어쩌면 김안녕에게 시 쓰기란 어쩌면 치유와 위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 속에 파묻힐 때는 명랑해졌다"라고 고백하는 시인은 시 속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이별과 슬픔을 이야기한다.
영원이라는 말을
순간이라는 시간을
가르쳐 준 장본인은 사랑이 아니라
이별
- 스승의 은혜, <사랑의 근력> 수록
사랑만큼 근력이 필요한 종목도 없다
소설가 이승우는 책 <사랑의 생애>에서 사람을 '사랑의 숙주'라고 표현했다. 사람이 사랑에 빠져드는 게 아니라 사랑이 사람 속으로 들어와 생을 사는 기생체로 표현했다. 진실로 사랑이 사람을 숙주 삼아 마음껏 격동한다면,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사랑의 근력'이 필요하다. 그 격동에 몸을 움직여야 할 테니 말이다.
씹다 붙인 껌처럼
사랑만큼 근력이 필요한 종목도 없다
- 사랑의 발견, <사랑의 근력> 수록
반면 시인은 사랑을 씹다 붙인 껌에 비유한다. 씹다 붙인 껌은 단물이 빠진 껌일테다. 격동적이라기보다는 초라한 모습. 간신히 턱걸이하는 인간의 모습이 상상되며 애처롭기까지 하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 있었다"는 마음처럼 사랑도 근력이 필요할 종목이라는 말에 수긍이 간다.
울던 화자가 시에 파묻힐 때 명랑해졌던 것처럼 내게 시 읽기는 단어 치료와도 같다. 평소에는 스쳐 지나갔을지 모를 단어일지라도 한 폭의 시 안에서는 마음에 박혀버린다. 때로는 날카로운 송곳처럼, 때로는 잔잔한 파도처럼. 단어가 전하는 고통과 위로가 희열을 전한다. 단물 가득한 시는 아닐지라도 오히려 씹다 붙인 껌 같은 시가 내 삶을 생생하게 위로하는 듯하다.
시 읽기가 끝났지만 여전히 시와 사랑은 모두가 알쏭달쏭하다. 하지만 과거에 수많은 사랑 책을 뒤지며 헤맸던 때와는 다르다. 지금은 차창의 '씹다 붙인 껌'과 '이빨 자국'이 마음에 든다. 어쩌면 정말 '사랑의 근력'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폭염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서있는 여름이라는 계절. 시라는 거대한 우주 속으로 풍덩 들어가 뜨거운 열기를 식혀보는 건 어떨까. 사랑과 이별로 채워진 시라면 어떤 위로든 손에 잡히지 않을까. 뜨겁든 차갑든 그렇게 헤엄치다 보면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오지 않을까.
(오마이뉴스 기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