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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집사 Sep 08. 2024

일상을 위한 작은 일터

주방



주방 여기저기에 물건을 잘 올려두지 않는다. 도마며 냄비며 필요할 때 수납장에서 꺼내 쓰고, 사용하면 바로 정리한다. 정수기 위쪽 선반엔 컵이, 아래엔 전기밥솥과 믹서기가 있다. 싱크대 쪽으론 그릇들이, 그 아래엔 재사용 비닐과 천연세제, 쓰레기통이 있다. 가스레인지와 작업대 주변으론 팬과 냄비, 조리도구, 조미료와 밀폐용기, 행주가 있다. 낭비 없고 효율적인 쓰임을 위해 모든 도구는 최소 수량으로 최적 동선에 자리 잡는다.



반대편 벽 쪽으로 식탁이 놓여있다. 이곳에서 밥도 먹고 작업도 하고 쉬기도 하며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거실을 바라보는 쪽에 의자 하나만 있고, 반려인과 식사를 할 땐 작은방 의자를 하나 더 가져온다. 그 위에는 매일 먹는 약상자와 냥이들의 사료통만 있다. 10년 전 결혼할 때 구입한 원목 테이블라 수시로 다리가 삐꺽거려 종종 육각랜치로 조여주어야 한다.



주방은 전체적으로 블랙과 화이트, 약간의 원목톤을 띤다. 가전도 블랙과 스텐으로 통일된 느낌이다. 이곳의 컨셉은 ‘질리지 않는 일상 일터’이다. 돈이 아닌 내적 자발성을 원동력을 필요로 하는 곳이기에 최대한 지속가능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한다.



매일 새벽 6시면 주방으로 출근한다. 3평 남짓 공간에서 라디오를 틀고 물을 마시고 웨이팅 중인 냥이들을 챙긴다. 그리곤 다용도실로 가 냉장고를 열어 식재료를 살핀다. 몸이 아픈 뒤론 냉장고를 빼곡히 채우지 않는다. 신선한 재료를 필요한 만큼 사다 놓고, 먹을 만큼 차리는 번거로운 일을 소명처럼 정성스럽게 하고 있다. 장보기 전날이면 냉장실은 추수 끝낸 허허벌판이 된다. 그 안을 다시 제철 채소로 채우고 관리하며 농부의 마음을 배운다.



오전 오후 두 번, 집안일 사이사이 식탁에 앉아 작업을 한다. 차를 내리고 패드를 열어 팬슬촉이 닳고 키보드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그리고 쓴다. 그렇게 매일 이곳에서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연습을 한다. 알아주지 않는 대가 없는 일이지만 자신을 아끼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또한 농부의 마음이 필요하겠지…



고인의 집을 정리해 주는 사람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언젠가를 기약하며 쓰지 않고 쌓아둔 물건들이 남은 이들에게 쓰레기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재산, 직업, 병, 인맥 같은 건 있다 없다 해서 그것들로 나를 설명하긴 어렵다. 하지만 누군가가 머물렀던 공간을 보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머물렀던 시간과 공간도 내 일상의 태도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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