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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월애 Jul 04. 2024

함께하는 데이 15, ‘소리’

셋째, 마지막 가족

난 호주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맡아서 돌보아 준 적이 있고 그 뒤로, 세 마리의 아이를 입양해서 함께 살았고 지금 남은 셋째와 살고 있다.


처음 아이부터 이야기해 보자면

바쁜 젊은 프로페셔널이 일 때문에 아이를 돌 볼 시간이 없어 내가 맡아서 돌봐주게 된 토리

거의 10개월 정도를 보살펴 주었는데, 가족이 있는 집이 좋겠다면서 원래 주인이 가족이 많은 집으로 입양을 보냈다.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너무 슬펐던 기억이 난다.


혼자서 반려견을 키울 수 있겠다는 10개월의 경험으로 나는 아이를 찾았고

파양위기에 놓인 아이를 600불인가 주고 데려왔다.

토리랑 비슷한 하얀 털을 가진 아이

털만 이뻤지 작게 보이려고 먼저주인이 안 먹여서 골았던 아이였다.

그렇게 마리”를 입양을 했고

6개월 뒤에 “두리”라는 아이를 입양해서 혼자 남아 외롭지 않도록 자매로 키웠다.

천사같이 하얗고 너무 이뻤던 아이, 두리

두 번째여서 두리라고 지어주었다.

이 둘은 둘도 없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잘 지냈는데  동생두리는 조금은 모자란 언니를 그렇게 살뜰히 보살펴주었었다. 음식을 가지고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 아이들.  엄마처럼 언니 마리를 핥아주고 자기 밥도 주던 어른스러운 아이, 생각해 보면 가장 외롭던 내가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이렇게 평생 행복할 줄 알았는데

둘째 아이 두리는 다섯 살도 안 돼서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나보내야 했다. 유난히 엄마를 사랑하고 아플 때 내 가슴에서 잠들던 아이여서, 떠난 아이를 아무 데도 보낼 수 없어서 아이를 집 뒷마당에 묻어주었다.  8년이 지나고 나서야 천도재를 지내주었고, 도반스님이 자연으로 이제 보내주어도

된다 하여 그 위에 라임 나무를 싶어 수목장을 해주었다.

엄마를 극진히 사랑하던 아이인데 나도 아팠던 터라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오래 잡을 수도 없었고, 나도 우리 마리도 상처를 크게 입었다. 우리 둘 다 슬프게 살았다.


첫째 마리는 우울증을 심하게 알았다. 달이 갈수록 증상이 심해 일가면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직 어리니 동생은 들이기로 맘먹었다.

1년이 지난 무렵

우리의 셋째

“소리”가 천사처럼 우리를 찾아왔다.

어느 가정집에서 강아지를 너무 많이 낳아 분양한다는 걸 보고 찾아갔다. 하얀색 강아지들이 많았고

그중에 튼튼해 보이는 여자아이를 찾았다.

소리를 처음 보러 간 날을 난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마리를 데려갔는데  강아지들이 너무 많아서 얼떨떨하던 우리 마리에게 이쁜 아가가 다가와서 두리처럼 마리를 핥아 주는 게 아닌가…

전에 “두리”가 하던 행동과 같아서 난 놀랐다.

두 달 밖에 안된 아이가 마리를 핥아 주는 광경이 전에 두 아이를 보는 것 처럼 오버랩이 되었다.

문득 두리가 환생을 한건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우리 집에 데려와서도 뒷마당에 쉬를 하라고 내려놓으니 냄새를 맡으러 다니다가

두리의 무덤에 가서 앉아 있기도 해서

난 정말 두리가 다시 환생해서 우리에게로 온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많다.

동물은 사람보다 더 빨리 환생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마리는 새 동생을 얻었고, 귀가 짝짝이인 소리는  소리라도 잘 들으라고 “소리” sound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렸을 적 소리의 모습이다.

두리와는 다르게 엄청 개구쟁이였다.

온몸에 진흙탕을 묻히고 와서 혼난 적도 있다.


소리가 오고 처음엔 어색해하더니만

한 달 정도 지나고 마리는 더 이상 울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았다. 다시 행복해 쳤고 마리와 소리는 모든 것을 같이 했다.

개구쟁이 동생 소리와 얼마나 잘 지내던지 걱정이 없었다.

둘 다 엄마 바보이지만

행복하게 지냈다.


마리가 많이 아팠을 때도 소리는 언니를 떠나지 않았다.

언니 옆에 떡 붙어서 있고 언니를 만지고 잠들고

언니와 항상 함께 해주는 멋진 아이였다.


언니와 병원을 다니고, 언니와 항상 붙어 있던 아이.



마리를 떠나보내고 나서는 이제 소리가 걱정이 됐다. 껌딱지처럼 다니던 큰언니가 없으니 얼마나 마음이 텅 비고 불안할까…

원래 불안이 많아서 언니 옆에 딱 붙어살던 우리 막내 아기 소리…

그래서 언니가 떠나고 나서는

내가 엄마가 되어주고 언니도 돼주어야 했다.

몇 년 동안 엄마를 못 뵈러 가서 잠시 다녀온 일주일이

아이에겐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난 그 뒤로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이제는.

소리는 마리가 혼자가 됐을 때처럼 우울했고

잘 웃지 않았다.

슬픈 아이를 캥거루 주머니 같은 백을 사서 자주  안아주어도 한동안 조용했다.

그래서 무조건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언니가 쓰던 강아지 유모차 말고 소리의 유모차를 새로 장만했고 조금씩 연습해서 슈퍼마켓에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어디든지 같이 다니고 강아지기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든 같이 갔다.

함께 할 땐 행복하고 덜 불안하지만


일을 갈 때는 항상 혼자가 되는 아이.

나이가 먹었어도 말 못 하는 한 살 도 안 되는 아이일 뿐이다.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걸 보면 가슴이 아팠다.

사진엔 없지만 자주 일어서서 문 앞에서 엄마를 기다린다.

우리 집엔 하우스메이트들이 있지만 모두 늦게 온다.

적어도 10시간을 혼자 있으니  그 시간이 가장 무서운 시간이다. 비가 오고 천둥이 치면 최악이다.

바들바들 떠는데 나까지 없으면 너무 불행해버린다.

언니들이 있어도 소리는 문 앞에서 엄마를 기다린다. 소리는 엄마가 누군지 아는 것이다.

집에 오면 하울링을 하면서 몇 분을 울어대고 핥아댄다. 머리를 들이대고 아픈 다리로 껑충껑충 뛴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왔냐며 엄마에게 투덜거리고 울면서 엄마를 반긴다.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말이다.

난 너무 무섭고 외로웠다고 표현하는 아이를 보면 반갑고 안타깝고 슬프다.


그런데 엄마인 난

소리에게 동생을 구해줄 수가 없었다.

항상 나보다 먼저 떠난 내 반려견들처럼  다이상은 그 슬픔을 경험할 가슴이 없으니까…

소리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서서 나도 소리처럼 불안해지고 슬픔이 밀려온다.

경험은 경험일 뿐 소리를 잃을 슬픔이 두렵기까지 하다.


11년 동안 10년 언니와 함께 살던 소리

혼자 버티다가 외로움과 불안함에 병이 나버린 너

혈압이 오르고 불안하고 외로워서 가슴이 벌렁거리다가 판막이 망가지고

심장이 제대로 작동을 못하니 폐에 물이 차기 시작하고

아직은 어린  나이인데…

겨우 열한 살인데

엄마인 난 너무너무 슬펐다.

죄책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내가 좀 더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함께 있어주니까

몸은 아파도 심적으로 편안해하는 게 보였는데


데리고 일을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너무 미안하다.

사람이 일하는 병원이라서 더욱 허락도 안될 테고

출근을 다시 하기 시작하면  소리도 나도 불안해질 것 같다.

내 직업은 집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8월에도 휴가가 있고 9월에도 휴가를 냈다.


난 마법사라도  되고 싶다.

마법사가 돼서 아이의 병을 매직처럼 낫게 해주고 싶다.

텔레피시라도 간절하게 높여서 아이와 정신적으로라도 교감하고 싶다.

내가 아이에게 마음아로 신호를 보내면 아이가 나의 텔레파시를 받고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서로 교감이 통하길 간절히 바라면서 잠을 청해 본다.

꿈속에서라도 텔레파시가 통하도록  기적이 일어났으면 한다.


사랑한다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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