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다. 집 근처에 걸어서 갈 수 있는 도서관이 3개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중에 1군데는 (열람실도 없는데) 무려 밤 10시까지 문을 연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전국에서 손 꼽힐 것 같다.
읽고 싶었던 책 리스트들이 있는 경우는 미리 예약하여 빌리지만, 리스트가 바닥이 날 때에는 책장에서 읽고 싶은 책들을 찾는다.별을 고르듯 책을 고른다. 어떤 강연을 들을까. 책 속의 그 사람은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까를 상상하며 잔뜩 설렌다.
처음에는 아무도 읽지 않은 빳빳한 새 책이 좋아 신간 책장을 어슬렁거렸다. 그런데, 몇 번의 쓴 경험 후 신간 책장은 요즘엔 거의 찾지 않는다. 또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무조건 신봉하지도 않는다. 대체적으로는 ' 왜 유명한지 알겠다 ' 싶은 책 들이지만, 나와는 치명적으로 맞지 않은 책들도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기호에 맞는다고 내 기호까지 만족시킬 수는 없으니깐 말이다. 그러다 보니 마치 나는소개팅 상대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이 미팅에 나가는 사람처럼 책을 고른다. 운명적인 만남을, 동화 같은 사랑이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 이번에 만나는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겠지? '하는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책을 고른다. 일단 책 제목을 보고 책을 빼든다. 그다음 표지 디자인을 보고, 지은이 소개를 본다. 그래도 뭔가 갸우뚱하면 목차를 훑고 책을 빌린다. 내가 고른 책이 하나둘 쌓이고 묵직한 책 더미를 안고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행복하다.
# 이별은 쿨하게
가져온 책 중에서도 어떤 것을 읽을지 고르는 것도 큰 재미다. 이걸 먼저 볼까. 저걸 먼저 볼까. 하고 선택하는 재미가 있다. 저자의 첫 번째 글인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대충 어떠한 흐름인지를 예측해 본 후, 책을 읽어 나간다.
개중에 어떤 책들은 읽는 도중에 미련 없이 ' 탁 ' 하고 덮어 버리기도 한다.남은 부분보다 읽어낸 부분이 많아도 상관없이,' 도저히 안되겠다 '하고 덮는다. (참고로 그런 책들은 리뷰하지 않습니다) 책이 잘못된 경우도 있고 내가 잘못인 경우도 있다. 책이 잘못된 경우는 마치 첫인상이 좋아서 사귀기 시작했는데 만나 보니 영 별로인 사람과 같다.책 표지에 있는 제목이나, 소제목은 아주 훌륭한데 정작 알맹이가 없는 책들이 그렇다.' 아고 내가 속았네 '하고 얼른 덮는다. 작가 장강명 씨는 이런 책들을 보고 ' 종이 낭비 '라고 이야기했다. 1쇄에 보통 1000권에서 1500권이 인쇄된다고 하니, 종이 낭비가 맞다.
번역된 책 중에서도 문장 간의 구성이 엉망인 책들도 있다. 참을성 있게 읽어 보려고 해도, 도무지 진도가 안 나가거나 자꾸 흐름이 막히는 책들도 역시 덮어 버린다. 반대로 작가가 한국인인가?라고 의심될 정도로 완벽한 문장인 책들은 번역가 이름도 다시 한번 살피게 된다. 그런 책들은 가끔 번역가가 책의 말미나 처음에 글을 남기는데, 해당 번역가의 한글로 쓴 글 역시 작가가 쓴 글 마냥 매우 훌륭하다. 확신하건대 그분은 아마 책을 사랑하고 늘 가까이하는 사람일 것이다.
반대로 내가 문제라 책을 중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썩 훌륭하지 않은 문해력을 지닌 덕에 어려운 단어가 즐비하여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자꾸만 서게 되는 책들도 역시 덮는다. 정말 훌륭한 말씀이 녹아있는 아주 좋은 책이지만 해석할 수 있는 재간이 없는 나는 그만 머리가 너무 지끈거려 읽기를 포기한다. 그러니깐 마치 대화를 하듯 술술 읽혀 지는 책들. 그런 책들이 결국 끝까지 읽혔다.
# 추억을 남기듯, 포스트잇을 붙인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신중하게(?) 책을 고르고 있는데 뭐가 ' 툭 ' 하고 떨어졌다. 상품권 봉투다. 안에는 무려 5만원권의 백화점 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 하.. 이 사람도 나랑 비슷한 사람이네 ' 하며 도서관 사서에게 전달해 주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책갈피라고 해서 특별한 게 없다. 주로 몇 개가 책장 위에 비치되어 있지만, 책갈피라고 할 수 없는 몹쓸 것들이다. 은행에서 받았던 현금 봉투 몇 가지와 엽서, 절반으로 접힌 A4 용지 같은 것이 책갈피를 대신한다.
책을 읽다 중간중간 좋은 구절이 나오면 표시를 해둘 포스트 잇도 항상 곁에 두고 읽는 편이다. 가끔 오래된 책들은 한쪽 귀퉁이가 접혔던 흔적이 있기도 한데, 그럴 때면 누군지 모를 이 사람도 나와 비슷한 구절을 읽고 감동했겠구나 하고 짐작해 보는 작은 재미도 있다.
# 영원히 곁에 남아줘
책을 다 읽고 나서는 포스트잇으로 붙여 두었던 부분들을 리뷰로 남기거나 엑셀파일로 정리해 둔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은 구절들이 특히나 많았던 책들은 구매로 이어진다. 그런 책들은 밑줄을 좍좍 그어두고 오래도록 봐야 하는 인생의 책들이 되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도 한참을 만지작거리게 하는 책. 여운이 남는 책은 꼭 저자를 검색한다. 혹시 저자의 다른 책이 있을까? 유튜브에 강의한 내용은 없는지, 인터뷰한 기사는 없는지 하고 찾아보게 된다. 그렇게 저자의 팬이 된다. 때로는' 어떻게 이런 좋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했을까? ' 하며 독자로서 안타까워할 때도 있다.
# 스토커가 되어도 좋아
내가 책을 보는 이유는 답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요즘 내가 고민하는 문제,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 답을 내지 못한 숙제, 더 알고 싶은 학문까지. 내가 현재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나보다 먼저 고민하고 답을 낸 사람들의 말을 듣기 위해서다. 그런 면에서 보면 ' 책 속에 길이 있다 '라는 말은 정말 명언 중의 명언이다. 문제의 ' 답 '을 찾게 되는 순간은 마치 슈퍼마리오가 버섯을 먹고 ' 따란따라라 ' 하고 커지듯 소리를 내며 자라는 나를 느낀다. 답을 찾아낸 나는 그렇게 또 한발 더 내 디딜 수 있다.그리고 그런 성장을 경험한 사람들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덕질은 시작된다.
만약 아직도 그런 경험이 없다면, 꼭 그런 보석 같은 경험을 살면서 한번은 해보길 바란다. 그렇게 되면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취미를 얻게 된다. 오래된 친구를 얻듯, 스승을 얻듯 책을 보게 된다. 책의 감촉과 사각사각 소리, 종이의 냄새까지 사랑하는 진정한 덕후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