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선언문

by 러너인

출판사에 본격적으로 투고를 시작하기 이틀 전인 3월 5일, 동아마라톤 풀코스 패키지가 집으로 도착했다. 봉투를 뜯으려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순간 멈췄다. 동아마라톤 대회 공식패키지에 기념 T, 안내책자, 에너지젤 외에 내가 쓴 책이 들어있는 상상을 해보았다. 먹는 것 말고 러너들의 마음을 건드려줄 달리기 에세이 한 권쯤 패키지에 들어가도 좋지 않을까? 내가 쓴 책이 대한민국 메이저 마라톤 대회 패키지에 들어있는 상상을 했다.

아직 투고조차 안 한 주제에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러너들이 누가 네 책을 보겠냐고 작은 마음은 계속 떠들어댔다.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비웃는 그에게 직접 눈으로 보여주기로 했다. 방을 둘러보다가 책꽂이에서 표지에 여백이 많은 책 한 권을 찾았다. 당시 생각했던 책 제목(가제 : 마흔여섯 직장인, 회사보다 먼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과 필명(글 쓰는 러너)을 표지에 매직으로 크게 써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

동아마라톤을 신청한 수만 명 러너들에게 내 책이 패키지에 같이 배송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내 책 제목으로 고쳐 쓴 책을 택배 봉투 속에 집어넣었다가 처음처럼 다시 꺼냈다. 배송된 패키지에 내 책이 들어있다고 상상하며 사진을 찍었다. 패키지 내용물 옆에 내가 쓴 가상의 책을 놓고 사진, 마라톤 배번표와 연출사진을 찍었다. 진짜 패키지에 책이 들어있다면 했을 행동을 실제로 해보며 사진으로 남겼다.

이왕 꾸는 꿈, 더 환하고 빛나는 꿈을 꾸기로 했다. 마라톤대회 패키지에 대회 후 다시 안 볼 안내책자 외에 처음 풀코스에 도전하는 초보러너들이 읽으면서 용기 낼 수 있는 생생한 달리기 에세이 한 권쯤은 같이 들어있으면 낫지 않을까? 그냥 책이나 한 권 내면 좋겠다는 마음이 아니었다. 출판사 투고 전 날, 작가 지망생 이전에 러너로써 더 큰 꿈을 꾸었다. 겨울 내내 준비했던 메이저대회인 동아마라톤 패키지에 내 책이 들어있는 꿈을 꾸었다.


너는 언젠가 반드시 동아마라톤, 춘천마라톤, jtbc마라톤 등 메이저대회 패키지에 들어갈 책을 쓸 거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넌 낙담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아질 것이라고 믿고 다시 뛸 수 있게 만드는, 삶을 바꿀 책을 낼 것이라고. 믿지 못하는 작은 마음에게 그 꿈이 현실임을 눈으로 보여주었다.

가장 어두울 때 가장 환한 꿈을 꾼다. 지금 이 순간 출판사 투고를 꿈꾸는 분들, 투고를 준비하는 작가님들께 남몰래 간직했던 꿈 이야기를 오늘 고백한다. 투고 시작 전 흐릿한 안갯속에 서있던 내게 용기를 약속했던 꿈 이야기이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자신조차 믿지 않으려는 가장 어두운 순간조차 세상이 꿈꾸지 못한 더 크고 환한 꿈을 꾸는 당신이 되길 바란다. 3월 5일 동아마라톤 패키지 앞에 서서 책 표지에 내 책이름을 쓰며 꿈꾸던 나처럼.

"이제 훈련은 다 끝났습니다." 코치님의 음성이 가슴에 조용히 닿았다. 숨가쁘게 달려온 러닝클래스 집중훈련이 끝났다. 12주. 일주일에 2번.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7시 20분. 총 24회 훈련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1월부터 시작한 무조건 작가 되기 프로젝트 줌 수업이 목요일 밤 10시라서 일하고 정시 퇴근 후 지하철역까지 달려서 러닝수업에 갔다. 9시 반쯤 러닝훈련을 마친 후, 집에 오자마자 리딩작가님의 줌 수업을 들었다. 줌 수업 중간에 딸아이를 픽업해야 해서, 운전하며 나머지 수업을 듣곤 했다. 내겐 달리기와 책쓰기 모두 소중했다. 정신없이 바빴지만 어느 하나 놓을 수 없었다. 주말마다 30km 이상 장거리를 달리며 투고 준비를 마치고 투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살면서 거절당한 경험은 많지 않다. 운이 좋았다기 보단 거절당하거나 지는 것이 싫어서 처음부터 도전을 피해온 탓이다. 러너 이전의 삶이 그랬다. 러너가 되기 전까지, 자존심은 오랫동안 나를 작고 안전한 세상에 머물게 했다. 상처받기 싫어서 용기 내지 못한 일도 많았다. 두려워서 나가지 못한 모임도 많았고 낯선 경험을 피하려 반복적이고 안전한 성실한 삶 속에 몸과 마음을 숨기기도 했다. 3년 전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했다. 가볍게 도전했다가 떨어졌다. 너무 성의 없이 신청한 것 같아서 정성을 쏟은 후 다시 지원했다. 또 떨어졌다. 자존심이 상했다. 다른 컨셉으로 세 번째 지원했다. 결과가 나왔다. 또 불합격이었다.

출판사에 투고메일을 보내기 시작한 후 최근 두 군데에서 거절의 피드백을 받았다. 속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절의 급이 달라졌음을 새롭게 배웠다. 3년 전에는 출판사가 아닌 브런치 앱에 글 쓸 자격을 얻기 위해 도전하고 불합격 메일을 받았었다. 이번엔 급이 달랐다. 정식 출간기획서를 보내고 출판사의 출간 담당자로부터 받은 피드백이다. 3년 전 아마추어 작가 플랫폼에서 받은 거절 메일과 정식 출판사에 투고해서 받은 거절 메일은 느낌부터 달랐다. 글을 몇 줄 끄적일 기회라도 달라고 소망하던 3년 전 작은 마음은 이제 세상을 향해 책을 낼 기회를 달라는 커다란 요구로 바뀌었다. 그래봐야 똑같은 거절의 메시지라 비웃을 수 있지만, 욕망의 크기와 거절의 크기는 예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도전하고 중도에 경기를 포기하는 DNF(Did Not Finish)도 급이 있다. 동네 마라톤 대회에서 dnf를 하는 것과 세계적인 공인 마라톤 대회에서 dnf를 하는 것은 경험의 수준이 다르다. 내 인생을 남들이 대신 달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거절에 좌절하지 않기로 했다. 50번, 아니 100번. 아니 대한민국 모든 출판사에서 거부당해도 낙심하지 않기로 했다. 메일함이 거절 메시지로 가득 차더라도 새롭게 펼쳐지는 경험에 감사하기로 했다.

첫 100km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하며, '이것만 이겨낼 수 있다면 앞으로 못 견딜 일은 없다고, 이것만 견디면 무슨 일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시도하지 않으면 실패는 없다. 첫 거절은 속상했지만, 두 번째부터는 괜찮았다. 오히려 정식 출판사에서 거절 메일을 받은 객관적 사실이 새롭게 도전하는 삶의 인증서처럼 느껴졌다.

주말에 도서관에서 작가 선언문을 썼다.
[정승우 작가 선언문]
"나는 나만의 고유한 능력과 경험을 담은 책으로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사후 책으로 나를 만날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불어넣을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도 나를 책으로 만날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겠다고 적을 때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 어느 날, 나처럼 힘들어하던 누군가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내가 쓴 책을 집어 들고 눈물을 흘리며 읽고, 조금씩 용기 내어 새벽을 달리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 한 사람을 위해 책을 쓰기로 했다. 계속 투고하기로 했다. 출판사 거절 메일에 상심하지 않고, 다음 세상에서 내 책을 보고 용기를 낼 소중한 그를 위해 끝까지 완주하기로 했다. 난 100km 울트라마라토너니까.

"승우님. 거절이 익숙하지 않아서 속상하지는 않으실지 염려스럽네요. 저희 1차 투고한 지 일주일 조금 지났는데요. 사실 2주 정도는 기다려봐야 하긴 하는데, 2차 투고를 진행해 볼까 해요."
"선생님. 전 사실 브런치 작가 신청 때 세 번 불합격 피드백받으면서 힘들었지만, 이제는 거절의 급이 달라진 자체에 주목하고 있어요. 50번이든 100번이든 필요하면 다시 해야 하니까요. 선생님. 실망시키지 않도록 계속 노력할게요."
"승우님. 마음 단단히 먹어주셔서 감사해요. 말씀 들으니 저도 힘이 되네요. 저는 실망하지 않아요. 이미 너무 멋지게 누구보다 열심히 잘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느끼고 승우님 존경하고 응원합니다. 다만 노력하셨으니 그만큼 좋은 결과를 얻으실 수 있도록 끝까지 해봐야지요. 제 기억이 맞다면 저희 3월 18일에 투고하고 또 2주가량 흐른 것 같아요. 좀 더 적극적으로 투고해봐야 할 것 같아요. 이번엔 124개 출판사 목록 전달드립니다. 메일 본문에 sns 인스타도 적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2024년 4월 1일 어느 출판사에서 답장메일이 와있었다. "ㅇㅇ출판사 원고 보완 디렉팅 예시"라는 pdf 첨부파일이 눈에 띄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열었다. 투고 시작 25일째 되던 날이었다.

keyword
이전 10화우리 오늘부터 투고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