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은 뜻밖의 시간에 온다.

by 러너인

"선생님. 안녕하세요. 페인트 칠 이후로 집 보러 온 팀이 한 팀도 없네요. 다음 주면 5월인데 만기 5월 31일까지 이제 두 달도 남지 않는 기간이라 저희도 이사 갈 집을 계약해야 해서 다음 주부터는 저희도 집을 보러 다니겠습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7개월째 고민 중이었다. 만기가 24년 1월인 전세였다. 24년 10월 처음 내놓을 때 이렇게 오랫동안 속을 썩일 줄 몰랐다. 매번 내놓으면 금방 나가서 신경 쓰지 않다가 이번에 호되게 시험을 치렀다. 집을 살 때 인테리어를 싹 하고 들어와서, 처음에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세입자 동의를 얻어 5월 말까지 만기를 4개월 연장했다. 아무리 늦게 나가더라도 5개월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투고와 달리기를 병행하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잠깐 반짝 손님이 오더 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아이들이 어려서 짐이 많아서 좁아 보이고 답답해 보여서 그럴 수 있다는 어느 부동산의 말에, 세입자분과 얼굴 붉힐 수 있는 상황이 생겼다. 정확히 상황을 확인하고 오라는 와이프의 특명이 떨어졌다. 결국 내가 특사로 파견되었다.

전셋집에 방문해서 집상태를 정확하게 확인하고 싶다고 세입자분께 연락했다. 아내가 본인이 직접 와서 보기 어려우니 꼼꼼하게 현재 집 상황을 사진과 영상으로 찍어서 보내달라고 했다. 연차휴가를 내고 전셋집을 방문하니, 평일이라 아이들은 집에 없고 세입자 본인만 재택근무 중이었다. 본인들이 사는 모습을 찍어가는 것이 기분이 나쁠 것 같아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도저히 집 상태를 찍어가겠다는 말이 입에서 안 떨어져서 아이스브레이킹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4년째 계속해서 달리기에 빠져있다는 이야기와 100km 울트라마라톤에 도전했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관계의 문제도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어떻게 보면 약점이고 부끄러울 수 있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내자 그가 많이 놀라는 반응을 보이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살짝 감정이 올라와서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더 이상 그와 나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가 아니었다. 그저 세상을 조금 더 살아온 중년 남자와 조금 더 젊은 남자의 진솔한 대화였다. 전셋집에서의 '남자들의 수다'는 그렇게 4시간이나 이어졌다. 처음에 굳은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시작된 오늘의 만남이 이렇게 전개될 줄을 그도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진심을 다하는 것이 나의 장점이자 최선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내 이야기를 꺼내놓자 그도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공황장애로 힘들었던 이야기였다. 사실 그는 헬스로 몸이 다져진 몸짱이었다. 처음 전세 계약을 위해 그를 만났을 때 한 눈에도 조각 같은 몸매와 훤칠한 남자다운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랬던 그가 오늘 만나서 자세히 보니 보통 중년남자의 몸매로 변해있었다. 어느 날 이유 없이 찾아온 공황장애로 회사를 다니기도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운동을 하면 가빠지는 호흡이 마치 공황장애 증상과 비슷해서 유산소 운동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이제는 좀 어떠신가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젠 다 나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갑자기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참, 왜 다른 곳으로 이사 가려고 하시는지요? 저는 선생님이 앞으로도 계속 계셨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요."

그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진다. "사실 제가 신혼부부로 여기 들어와서 아이들 둘을 낳았잖아요. 2살, 3살이라 아이들이 어리고 남자아이도 있거든요. 아이들이 생기고 쿵쿵대며 뛰어다녀서 밑의 집에서 자꾸 전화가 오고 올라오셔서 힘드네요. 이제 무조건 1층으로 가려고 해요. 노이로제가 걸린 것처럼 제가 아이들만 보면 뛰지 말라고 소리부터 지르고 화만 내고 있어서 '어느 순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만기 때 이사 가겠다고 문자 드렸던 거예요. 저도 이 집 너무 깨끗하고 살기 좋아서 계속 있고 싶은데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그의 상황과 마음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소음방지 매트를 더 깔아보는 것은 어떨지 물어보고, 필요하면 저도 같이 보태겠다고 했지만, 아파트 구조적인 문제라 매트로는 커버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가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고 화를 내다가 부모로서 잘하고 있는 건지 속상해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화장실 청소를 할 때 딸들이 미울 때가 많았어요. 씻고 나면 바닥에 머리카락은 왜 그렇게 많이 떨어지는지. 매번 신경질을 내다가 하루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만일에 여기 긴 머리카락이 없는 것이 정말 좋은 일일까? 만일 머리카락이 없다고 상상해 보면 어떨까?' 어떤 이유로든 지금 내 곁에 아이들이 없다면, 화장실에 긴 머리카락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는 큰 병에 걸려서 탈모가 되는 경우에도 화장실에 긴 머리카락이 없을 거니까요.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고요. 화장실이 더럽다는 건 어쩌면 아이들이 건강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긴 머리카락은 어쩌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사하고 건강하다는 것을 알리는 행운의 증거가 아닐까 하고요."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입자 분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가 애써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오늘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 화장실 긴 머리카락에 감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지금 저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기 전에, 아이들이 뭔가를 어지럽혀서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오늘 선생님께서 해주신 이야기를 떠올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내볼게요. 고맙습니다."

그의 말에 나도 울컥했다. 사실 오늘 내가 전셋집에 온목적은 사실 집안의 동태를 살피고 대체 어떻게 집을 쓰고 있어서 이렇게 오래 집이 안 나가는지 조사해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본분을 완전히 잊고, 가장 노릇에 지친 두 남자의 힐링 토크로 하루를 보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께서 현재 전셋집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오신 건데, 이대로 그냥 가시면 사모님께 크게 혼나시는 거 아니에요? 저희는 상관없으니 집 곳곳 사진 마음껏 찍으시고 동영상으로도 구석구석 다 찍으세요. 정말 괜찮습니다."

나도 웃으며 말했다.
"괜히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집에 정확히 보고를 해야 해서 열심히 찍어 가겠습니다."
집안을 꼼꼼히 찍을 수 있도록 그가 도와주고, 보호매트를 들춰서 바닥 강화마루가 이상 없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동영상을 찍을 때는 본인이 나오면 불편할까 봐 방안에 들어가서 자리를 피해 준다. 미션을 모두 마친 후 그와 힘차게 악수를 하고 전셋집을 나섰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날 전셋집을 찍은 수십 장의 사진과 동영상을 와이프에게 보냈다. 물론 그 사진을 찍기 전에 4시간 동안이나 울고 웃던 '남자들의 수다'가 있었다는 것은 그와 나, 둘 만 아는 비밀이었다.

안도감도 잠시뿐, 비수기인지 이상하게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가고, 결국 연장 계약 마지막 달인 5월에 들어섰다. 설마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이라 보증금을 2천만 원 낮췄다. 대출을 알아보고 최악의 상황을 준비했다. 수억 원은 큰돈이다. 지금 있는 집을 담보로 빌릴 수는 있어도, 이자 부담이 엄청났다.

4월에는 출간 계약과 브런치 작가 승인으로 기뻤지만, 전세가 나가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 상급기관 종합감사로 1달을 날리고 가까스로 초고에 집중해도 모자란 시간에 세입자와 부동산 틈에서 하루하루 짓눌리고 있었다.

앞으로 주어진 시간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더 이상 세입자분과 기간 연장은 불가능했다. 5월 말로 이사 갈 집을 이미 구해 계약을 마쳤다는 소식에 하얗게 밤을 새웠다. 끝 모를 기다림이 두려웠다. 마감 기한이 다가오니 더 예민해지고 한없이 외로웠다. 대출을 준비할 때였다. 책 원고 쓰는 것도 잠시 멈췄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대출을 받아 보증금을 드리고 빈집으로 얼마나 오래 버틸지 막막했다.

5월 6일 대체공휴일, 연휴라 다들 쉬는 날, 와이프가 1년만 있겠다는 손님이 오후에 집을 보기로 했으니 직접 가서 반드시 계약을 꼭 성사시키라고 당부했다. 폭우가 내린다. 세찬 비바람에 우산이 휘어져서 비틀거렸다.
'네가 지금 딱 내 마음 같구나.' 쓴웃음이 났다. 휜 우산을 들고 비바람 속을 걷고 있을 때, 부동산에서 약속이 방금 취소되었다는 전화가 왔다.

맥이 탁 풀렸다. 쓰러지듯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다가, 갑자기 당근마켓이 생각났다. 중고폰 사고팔 때 아니면 써본 적이 없는 당근에 부동산 전세를 내놓는다니... 가능할까? 무작정 당근 앱을 열었다. 예전에 얼핏 생각은 했지만, 동네인증 때문에 못했던 것 같아서 전셋집에 온 김에 당근에 올리기로 했다. 사진을 올려야 하는데, 지금 상태로는 어린이 보호용 바닥 보호매트와 짐이 많아서 올리기가 망설여졌다..

일단 당근에 글부터 올렸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이왕 전셋집에 왔으니 손님맞이 청소라도 하기로 했다. 내가 걸레를 들고 베란다를 닦고 있으니, 세입자분도 땀 흘리며 함께 도왔다. 혹시 대출을 받더라도 후회가 없도록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하기로 했다. 3시간 정도 청소를 마치고 녹초가 되어 집을 나섰다. 달리고 싶었지만 그럴 힘과 정신조차 없었다. 책이고 뭐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5월 7일 화요일. 당근에서 알림이 떴다. 이웃 한 분이 매물 사진을 요청했다는 메시지다. 정신이 번뜩 났다. 사진이 없는 데 어쩌지? 문득 처음 이 집에 이사 올 때 아는 분께 부탁하여 인테리어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주방 구조에 포인트를 두어 특히 예쁜 사진들이 많았다. 인테리어 전후 비교사진을 그분이 운영하는 네이버 카페에 올렸던 기억이 났다.

그게 몇 년 전인데 아직 있을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카페에 들어갔다. 아직 살아있었다. 검색창에 아파트 이름과 인테리어 한 시기를 기억을 더듬어 검색했다. 놀랍게도 그때 올려주신 사진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로또가 당첨된 사람처럼 사진을 하나씩 다운받아서 당근마켓에 올렸다. 인테리어 후 찍은 사진을 찾아 올려놓고 꼼꼼하게 설명을 달았다.

5월 8일 수요일. 전세만기 23일 전. 계속 대출을 알아보고 있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당근에 올리신 전세, 주말에 가서 집 보고 싶어요. 언제쯤 시간 되세요?"
"네, 가능하세요! 근데 저희가 5월 말 만기라 대출받으시기 빠듯하실 수 있어요. 이사 오시려면 그쪽 일정도 맞아야 하는데 너무 촉박해서 괜찮으신지요?"
"아~ 저흰 예비 신혼부부라서 미리 집 사두려고 보는 거예요. 그리고 저희 대출 안 받아서 괜찮아요."
신기했다. 5월 12일에 만나기로 했다. 이틀 전 세입자분께 양해를 구하고 신발장에 가위를 걸었다. 미신이든 뭐든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기로 했다.

일요일. 드디어 D-day 아침이 밝았다. 새벽에 일어나 달리기 대신 방에서 108배 절을 하며 몸과 마음을 감사함으로 채웠다. 오후 2시, 그분들을 만났다. 하나씩 설명드리고 이야기를 나눴다. 어디까지 뭘 해드릴 수 있을지도 말씀드렸다. 저녁까지 연락을 주기로 했다.

늦은 오후 전화벨이 울렸다. 바로 계약하겠다고 했다. 5월 18일에 본계약을 하기로 했다. 가계약금이 들어온 것을 보고 울컥해져서 말없이 한참 동안 거리를 걸었다. 4월에 계약 후 한 달은 회사일로, 한 달은 전세 계약으로 아무 글도 쓰지 못했다. 초고 제출 마감기한인 8월 15일까지는 이제 겨우 2달 반. 늦었지만 최선을 다해 초고를 쓰기로 했다. 당근에서 산 14만 원짜리 노트북을 들고 집 앞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마음이 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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