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 저 이제 안 참습니다.

by 러너인

팀원 선생님이 아이를 가졌다. 첫아기 심장소리를 듣고 싶다며 휴가를 냈다. 출근해서 일하는데 그에게 연락이 왔다. 목소리에 설렘이 가득하다.

"팀장님! 와~ 진짜 신기해요. 저 와이프랑 병원 와서 방금 심장소리 들었어요."

언제였지? 첫째를 만난 때가 20년 전이라 가물가물하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나?'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축하의 말을 전하고 다시 일을 시작한다. 오후에 중요한 문서가 오면서 상황이 긴박해진다. 금세 진이 빠진다.

핸드폰으로 다시 그에게 전화가 왔다. 팀원 선생님이다. 받아보니 목소리가 몹시 가라앉아있다. 그가 맡은 연말에 부서장 지시로 급하게 마무리한 일 관련이다. 인사발령처럼 여러 사람과 연결된 일이라,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온 사람들의 항의전화를 쉬면서 많이 받아서 화가 나있다.

한참 동안 울분을 쏟아낸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얼핏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걱정된다. 급하게 진행했던 일이라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혹시라도 나중에 일이 터졌을 때 우리가 대응할 수 있어야 하니, 일부 기초자료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라고 했다.

"팀장님! 저 의심하시는 겁니까? 이미 끝나서 공지까지 했던데 이제와서요? 제가 일이 가끔 늦을 수는 있지만, 누구보다 더 꼼꼼히 확인하고 확실히 처리합니다. 저 그런 사람 아니라고요. 그렇게 의심한 사람들, 저 가만히 안 둘 겁니다! 안 참을 겁니다!"


그는 자기가 애쓴 결과물이 의심받는다고 생각했는지 화를 낸다. 그래도 확인하라고 시켰다. 잠시 후 그가 톡으로 이상 없다는 증빙을 보내며 마지막 결정적인 멘트를 날린다. "저 가만히 안 있습니다." 톡 위에 그 한마디가 계속 나를 노려본다.

수위를 넘은 것 같아서 화가 난다. 나는 지금 회사에서 더 큰 상황을 수습하느라 정신없는데, 쉬다가 짜증 난다고 전화해서 그렇게까지 하소연할 일인지. 전화해서 한 마디 하려다 참기로 했다.

한파로 가장 추운 날이다. 잠시 밖에 나가도 온몸이 얼어붙는 날씨다. 광교 바나나런클럽 목요일반 정기훈련날. 혹독한 훈련이 예상된다.

밑에는 레깅스 두 개를 껴입고, 위에는 겹겹이 레이어로, 장갑은 최고성능으로, 머리엔 비니, 얼굴을 덮는 도둑 두건 바라클라바, 게다가 안 하던 붙이는 핫팩도 발등에 붙인다. 중무장이다.

퇴근 후 트랙으로 달려간다. 강추위에 달리기 훈련 대신 보강훈련으로 수업이 대체된다. 사실 보강훈련이 더 힘들다. 조금씩 하면 스트레칭인 가벼운 리듬운동 동작들도 보강훈련에서 만나면 새롭다.

오늘 훈련은 크게 파트 1, 2로 나뉜다. 하나는 맨몸훈련, 다른 하나는 밴드훈련이다. 각각은 여러 동작으로 이어지고 동작과 동작은 쉬는 시간 없이 이어진다.

영원처럼 이어지는 코치님 구령에 정신이 아득하다.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지고 인상이 써진다. 입술을 질끈 깨문다. 땀이 비니를 가볍게 뚫고 나와 무심히 얼굴을 지나친다.

물 흐르듯 동작이 이어진다. 다리가 느려지고 호흡은 숨차다고 난리다. 무릎을 번갈아 들어 올리는 간단한 A스킵 동작조차 무서운 A+ 스킵이 될 수 있음을 오늘도 깨닫는다.

모두가 모범 바나나가 되는 날. 평소 숙제를 게을리한 F학점 러너들이 모여 스킵과목을 재수강하는 날. 나도 구슬땀을 흘리며 부지런히 F학점을 A+로 채운다. A스킵이 아닌 A+스킵이다.

오늘도 나는 훈련을 한다. 참다가 그조차 잊는 훈련. 참고 참다가 어느 순간 그 사실조차 잊었을 때부터 진정한 러너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때부터 정말로 팀장이 되는 게 아닐까.

한파로 달리기를 대체한 실내 보강훈련이 드디어 끝났다. 문득 아까 끝없이 이어지던 보강동작 때 울상으로 버티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승우님은 왜 울고 있어요?"라고 웃으시던 코치님 말씀도.

다시 팀원과의 이야기를 마친다. 톡으로 오늘 회사에서 어떤 긴박한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었다. 어느새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 된다. 그가 사과했다. "예. 저녁 잘 보내시고 오늘 팀장님께 하소연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힌 팀원 선생님께 웃으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아기아빠가 안 참긴... 참아야지. 선생님, 속상한 일 있으면 이야기해. 팀장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쉽시다. 아기아빠가 안 참으면 쓰나."

“승우 님은 무엇을 제일 잘하세요?”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참는 거요. 그리고 모든 일이 결국 나를 위해 일어난다고 믿는 거요. 그게 제가 잘하는 일이에요.”

잠들기 전 침대 위 천정에 붙여둔 참을 인 384개가 새겨진 큰 그림을 바라보며 잠이 들고, 감사한 마음으로 눈을 떠 하루를 시작한다.

"코치님. 그래도 전 참을 겁니다." 저는 러너니까요.
"선생님. 그래도 전 참을 겁니다." 저는 팀장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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