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행을 할 때 백팩을 하나 샀다. 따로 지퍼나 단추가 없고 카라비너로 여닫는 형태였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카라비너가 망가지고 말았다. 그래서 비슷한 크기의 카라비너를 다시 구해야 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카라비너란 이름조차 몰랐던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물건을 인터넷에서 살 수는 없으니 뭐든지 다 팔고 있을 것 같은 대형마트로 가서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마트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점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보디랭귀지를 섞어가며 내가 구하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열심히 설명했다.
다행히 한눈에 봐도 연륜이 꽤 있어 보이는 할아버지 점원은 나의 개떡 같은 설명을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그 물건의 이름이 카라비너라는 사실과 마트 무슨 코너에 있는지 알려주셨다. 드디어 백팩을 고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좋아했던 나는 또 실망을 하고 말았다. 그곳에서 판매 중인 카라비너는 꾹 눌러서 여는 것이 아니라 돌려서 여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가방을 여닫을 때마다 잠금장치를 돌돌돌 돌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구매를 망설이며 난감해하는 내 모습을 본 점원이 펜과 종이를 가져오더니 무언가를 쓱싹쓱싹 그리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내가 찾는 형태의 카라비너를 팔고 있는 다른 가게의 약도였다. 이 얼마나 친절한 점원이란 말인가! 점원은 나에게 약도를 건네주며 걸어서 10~1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물건을 꼭 찾길 바란다며 행운까지 빌어주었다.
덕분에 정말로 오랜만에 투박한 약도를 보며 작은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가 적어 놓은 이름의 건물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두리번거리며 길을 걷는데 마치 모험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코너마다 건물의 이름을 확인하며 조심스레 찾아간 결과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그만 구멍가게 같은 곳이었는데 계산대 바로 앞에 다양한 카라비너들이 걸려있었다. 개중에 마음이 가는 것 하나를 얼른 빼어 들었는데 원래 가방에 달려 있던 것보다 더 튼튼해 보였고 색과 모양도 더 마음에 들었다.
새로 산 가방이 금세 망가져서 꽤 속상했는데 결과만 놓고 보면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싶다. 손수 약도까지 그려주시는 할아버지 점원의 따뜻한 친절을 경험할 수 있었고 덕분에 여행 속 작은 여행을 즐길 수 있지 않았는가. 게다가 카라비너란 이름도 알게 되었고 이렇게 평생 추억할 수 있는 좋은 이야깃거리가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처럼 당장은 손해를 본 것 같아 속상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돌아보면 오히려 다행인 일들이 적지 않다. 그러니 눈앞의 걱정거리에 온통 마음을 뺏긴 채 너무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다 지나가기 마련이고 전 인생을 놓고 봤을 때는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