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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17. 2024

밑줄을 책 밖으로

밑줄을 친다는 것

책을 중간 정도 읽고 나면 다시 읽고 싶은 책인지,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은 책인지, 한 번만 읽고 말 책인지 결론이 나온다. 20% 정도 읽었을 때는 경험상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아직은 그 느낌과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읽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책의 중간 정도까지도 읽지 않고는 첫인상에 가까운 그런 문장들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모험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 첫인상이 통계적으로 정확해서 관상을 잘 본다는 수준의 평가를 받는 사람들을 보면 단지 경험이 많기 때문인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는데, 반대로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첫인상을 통한 판단이 정확하려면 모든 가능성을 두고 보았을 때 평범한 사람이라면 최소한 판단해 본 경험이라도 쌓여야 한다는 뜻이라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책을 읽을 때에도 첫인상이 책의 표지뿐인지, 표지와 목차인지, 앞부분 10%까지의 내용인지는 개인별로 나름대로 정할 수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그것을 중간, 약 40% 정도까지라고 보고 있다. 40% 정도까지가 첫인상이라는 말은, 책의 절반 정도도 읽지 않고는 나에게 도움이 될지, 재미라도 있을지 등에 대해 판단할 만한 최소한의 근거조차 얻기 힘들다는 뜻이다. 내가 책을 읽은 양이 일천해서 첫인상으로는 제대로 판별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고 책에는 첫인상이라는 것이 애초에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저자가 책을 통해서 하려는 이야기에 제대로 진입하기도 전에 이야기가 지루할 것 '같다'거나 나와는 맞지 않는 방향인 것 '같다'는 모호한 이유로 귀와 눈을 닫아 버리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기준을 유지한 지도 십몇 년 되었다. 애초에 책을 고를 때 표지의 홍보문구나 중간중간 펼쳐 보았을 때 느껴지는 말투며 문장의 구성 등은 충분히 보고 고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핑계를 댈 수 없어서 조금은 더 관대하게 판단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선은 분야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골랐을 것이고 둘째는 말투가 괜찮았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맞지 않는다면 뭔가 내용상 또렷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과 일할 사람을 직접 뽑는 면접관의 경우와 비슷하다. 다만 책은 일방적으로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또는 재미가 있을 것인가를 가지고 고르는데, 책을 고르는 일이 워낙 흔하고 한 권의 책으로부터 평생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니다 보니 다 읽고 나면 책꽂이에서 먼지가 쌓이도록 방치되거나 버려지거나 헌책방에 팔리거나 할 것이고 그렇게 되는 동안 또 다른 책에 대해 읽을지 말지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에 책을 고르는 고민은 상대적으로 가벼워지게 된다. 리디나 밀리의 서재 같은 곳에서 빌려 읽을 때에는 읽다가 말아도 돈이 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몇 페이지 읽다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더욱 쉽게 하게 되는 문제가 있기는 하다. 한 시간에 다운로드 받아서 읽을 수 있는 책은 한 권씩 구입하거나 직접 도서관에서 대출받아야 할 때보다 훨씬 많아졌지만 실제로 끝까지 읽는 책은 더 적어지는 것이다.
어떤 책을 다시 읽을지 말지 판단하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 읽어야 하느냐의 정도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빌린 책인데 다시 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냥 구입을 하는 편을 권한다. 구입한 책이라면 다시 헌책방에 팔거나 할 게 아니라면 다시 읽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면 맨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서 밑줄을 쳐도 된다. 내 경우에는 책을 세 번째 읽을 때 밑줄을 긋기로 정했다. 그렇게 내용에 약간 '집착'할 정도가 아니라면 밑줄을 그어 보았자 나중에 그 밑줄을 다시 볼 일이 없을 수도 있다.


밑줄의 한계
그렇지만 모든 경우에는 회색지대가 있는 법이다. 다시 읽을 책이라면 다시 읽을 때 주목할 부분에 밑줄을 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다시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밑줄은 치고 싶을 때, 한마디로 책 전체는 다시 읽을 것 같지 않지만 몇몇 구절들은 다시 읽고 싶은 책일 경우도 충분히 있다. 이런 책은 특히 도서관에서 빌렸을 경우에 고민이 되는데, 밑줄을 치고 다시 읽으려고 책을 구입하자니 정작 구입하고 나면 다시 읽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곱씹어 볼 만한 문장은 계속 튀어나온다,라는 상황이면 그 책(읽지도 않을 책)은 구입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과장해서, 5%의 밑줄을 위해 95%의 책을 함께 사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요즘 출판업계가 불황이다 보니 사야 할 이유를 만들어내기 위해 표지를 다시 씌워서 '리커버 본'이라고까지 하는데, 이건 책 가격을 묶어 놓고 할인을 하지 못하게 법률을 만들어버린 것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은 표지의 모양 때문에 비싼 가격의 책을 구입할 수 있다면, 만약 지금의 책 가격이 그렇게 비싸지 않았다면 마음에 드는 5%의 문장 때문에 구입했을 책도 더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하루의 대부분을 교과서와 참고서, 문제집을 읽으면서 보냈기 때문에 일반 단행본을 읽는다고 하면 한 권을 정하면 대여섯 번씩은 읽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은 두고두고 읽어야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구입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하면서 짬을 내어 서가에 내려와 대출해 갈 만한 책이 있는지 둘러본다고 해도 한 달에 한 권 고르기 힘들었다. 그보다는 그곳에서 필요한 곳만 골라서 읽다가 나왔다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당시 도서관에서 읽어 보고 결국 대출했던 책은 람세스와 황금나침반이 전부였던 것 같다. 다른 책들은 대출을 했어도 열람실에서 공부하다가 짬을 내어 읽고 집에 가는 길에 반납을 했을 뿐, 일주일 내내 읽거나 하지는 않았다. 각각 다섯 권, 세 권짜리였던 그 소설책들은 집에 와서도 읽고 다음 권을 빌리러 가는 주말을 기다리곤 했던 책이었다. 하지만 결국 황금 나침반은 스토리가 궁금해서 끝까지 읽었을 뿐이었고, 람세스는 밑줄을 치기 위해 한 권씩 구입을 했다.
그러다가 대학에 가고 나니 대학교 도서관은 시립도서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한 양의 책이 버티고 있었다. 보통 하루에 한두 시간은 서가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매일은 아니고 일주일에 두세 번이었을까, 그 정도였지만 그래도 무척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책을 검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 어떤 종류의 서가인지 파악한 후, 성경이면 성경, 물리학이면 물리학, 소설이면 소설, 그렇게 분야를 정해서 그곳에 꽂혀 있는 책을 골고루 둘러보면서 무작위로 한 권씩 뽑아서 읽어 보는 방식으로 '탐험'을 했다.
책을 읽어 보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매번 밑줄을 치고 싶은 욕망은 문제가 되었다. 책을 접하는 권 수가 고등학교 때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가면서 구입하고 싶은 책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모두 구입할 수는 없었고, 다시 읽어 보고 싶다고 해서 다시 대출을 받고 나면 그전에 눈에 띄었던 구절이 다시 보였다. 그래서 약간의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노트를 하나 마련해서 밑줄을 친 구절을 옮겨 적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밑줄을 그은 그 부분을 읽기 위해 책을 다시 펼칠 필요가 없다. 모두 옮겨 적기 위해서는 시간이 어느 정도 소요되었지만 그렇다고 매번 책을 꺼내어 읽는 것보다 못하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이 방법으로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도 서너 번 읽어서 매번 밑줄을 치겠다 싶은 부분이라면 얼마든지 다시 읽어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혹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히는 책이 있다. 내용을 다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지식적인 면이 아니라 감상적인 면에서 다른 의미가 있는 구절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더 깊이 느끼면서 처음 읽었을 때와 다르게 읽히는 것이다. 이것은 횟수가 늘어날수록 성숙해 가는 것과는 다르다. 그 책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 인생의 시간이 가면서 쌓이는 경험과 감정의 스펙트럼 덕분에 그전에는 가시광선의 범위가 아니었던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단지 세상을 녹색으로만 보던 것을 점차 빨간색도, 노란 색도 보게 되면서 마침내 노을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 같은 것이다. 그런 책은 어쩔 수 없이 구입해야 한다. 밑줄 따위를 동원해서 문장 한두 개를 떼어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문장만 얻어내면 되는 책이라면(게다가 내가 밑줄을 치겠다고 생각할 정도면 벌써 두 번은 읽었을 책일 테니까) 그 밑줄 친 부분을 읽으면 그 앞뒤 부분도 생각이 나게 되어 있다.


밑줄 친 문장 옮겨 적기
우선 노트 중 왼쪽에 세로로 줄이 한 줄 나 있는 것이 있다. 그 줄 앞에는 페이지를 적고 그 뒤에 문장을 적는다. 문장이 될 수도 있고 문단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한 페이지 전체가 될 수도 있다. 내가 밑줄을 긋는다면 그 범위 전체가 거기에 들어가게 된다. 옮겨 쓰는 수고가 필요할 뿐, 밑줄 자체가 다시 읽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다시 읽기 위해서라는 용도면에서는 완벽하게 호환되는 셈이다. 단순히 그럴듯한 문장이라서 밑줄을 긋는 사람이라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을 것이다. 밑줄을 긋는 데 이유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든 남에게 빌린 책이든 가리지 않고 밑줄을 긋는다. 순간의 쾌락만 중요할 뿐이라서 그 책을 본인은 절대 다시 읽을 일이 없다. 반면 나는 그 구절이 다시 그리워질 것을 알기에 노트에 옮긴다.
가장 처음으로 '람세스'의 밑줄들을 옮겼다. 다섯 권짜리 책이라 밑줄도 양이 조금 많았다. 하지만 역사책이 아니라 소설책으로 읽었기 때문에 교훈보다는 문장의 표현 자체가 밑줄의 주요 이유였다. 격렬한 표현들, 세심하게 관찰한 듯한 표현들. 하지만 특히 내가 어렸기 때문에 마음을 묘사한 부분들이 대다수였다. 그렇게 밑줄을 친 부분만 따로 정리를 해 놓고 보니 실제로 책을 꺼내어 읽을 일이 별로 없었다. 어차피 몇 번이나 읽은 책이어서 내용은 다 알고 있고, 펼쳐도 그 페이지와 앞 페이지 모두 영화처럼 장면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음악을 틀어놓고 차분히 맨 앞권부터 읽어 나간 적이 그 이후로도 두세 번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밑줄을 옮겨 적은 노트만 '람세스' 부분을 처음부터 끝가지 읽고 나면 책 다섯 권을 다 읽은 것과 같았다. 마지막 밑줄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과 다르다. 그럼에도 그 다섯 권의 수많은 에피소드가 지나간 듯한 여운은 동일하다.
그 이후로는 집에 있는 책의 밑줄들을 차례로 베끼기 시작했다. 밑줄을 치기 위해 서너 번은 읽었던 책이었다. 다시 밑줄을 하나하나 찾아내기 위해 다시 읽었다. 밑줄을 치기 위해 구입한 책들이라 다시 읽는 것도 즐거웠다. 그렇지만 아쉬운 건 몇 번 이사를 다니는 과정에서 그 책들을 결국 모두 버렸다는 것이다. 노트만 읽어도 된다는 점이 한몫하기는 했지만, 그 노트가 없었어도 모두 가지고 다닐 수가 없어서 결국 버릴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노트를 만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구입해서 열성적으로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던 '지식노동자 선은'은 노트에 없다. 그전에서 노트를 만들기까지 그 시간의 중간쯤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었나 보다. 결국 몇 달 전에 다시 구입을 했지만 지금 건조해진 눈으로 바라보아서는 굳이 밑줄을 치면서까지 다시 읽어보고 싶은 구절은 눈에 띄지 않는다. 아직 절반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열병에 걸린 듯 '그 기회는 내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고민하는 그런 20대가 지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일반 노동자들의 세상에서 지식 노동자들의 세상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전 세계 산업을 지식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대형 기업들이 이끌고 있다는, 정부와 종교는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고 외치는 책이지만 결국 금융, 그러니까 신용주의가 자본을 손에 쥐고 있는 현실은 과거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다. 기존의 노동자와 지식 노동자, 정부와 기업 모두 어차피 금융사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자금을 어떤 비율로 나누어 갖느냐의 싸움일 뿐, 지식 노동자가 된다고 해서 세상을 뒤엎거나 기업이 한 국가를 흔들 정도로 큰다고 해서 앞으로의 성공이 정해진 것이 아닌 것이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 것은 인류의 오랜 전통이지만 나는 여기에 책을 서너 번 읽고 나서 긋는다는 조건을 추가했다. 그것은 마치 취향에도 관성이 있다는 듯, 서너 번이나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면 앞으로도 몇 번이고 더 읽을 것이라는 합당한 추론이었다. 이 단추가 올바르게 끼워졌기 때문에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읽고 싶은 것이 일부 내가 밑줄을 그은 그 문장들이라면, 그 문장들만 가지고 있다면 그 책의 본체는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으로 그 문장들을 노트에 쓸어 담았다. 그러한 문장으로만 된 노트가 생긴 것이다. 나중에는 그 노트들을 가지고 블로그를 만들어서 아무 때나 들어가서 읽어볼까 했지만 그건 그만두기로 했다. 공개 게시물이 아니라면 나조차 어차피 복잡하게 접속해서 읽어야 할 텐데, 그러면 온라인이라도 지금 집에 있는 노트를 펼치는 것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공개 게시물로 하자니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얼핏 생각해도 문제가 될 소지가 매우 많았다. 특히 블로그를 운영한다면 광고를 다는 것이 이제는 유행을 넘어 당연한 듯이 생각이 드는 시대이니 말이다.
쓸어 담았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의외로 노트는 두껍지 않다. 그만큼 의외로 밑줄을 그을 만큼 몇 번을 읽은 책은 별로 없었다는 뜻이다. 20년 동안 말이다. 충동구매한 책들, 표시는 했지만 책 안에서 장들 사이의, 단어들 사이의 관계들 때문에 표시를 했을 뿐, 인상 깊어서 다시 읽으려고 한 표시는 아닌 책들, 문장 번역이 이상해서 원서를 보고 바로잡기만 했던 책들 등도 많았지만 그런 것은 다시 읽으려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노트에 옮겨 적지 않았다. 자기 계발서의 경우에는 밑줄을 긋고 읽은 것도 많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없었던 것 같다. 서너 번 읽으면서 그은 밑줄이지만 옮겨 적은 책은 두세 권에 지나지 않는다. 보통은 특수한 경우를 특수한 경우라고 밝히지 않아서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책을 버린 경우도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자기 계발은 자신이 하는 것이고, '자기 계발 전문가'라고 하면 다른 사람을 바꾸는 것인데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정신의학계에서 단순한 돈벌이로 삼도록 놓아둘 거라는 생각은 하기 힘들었다. 이미 자기 계발서 중에 뇌과학에 관한 책들도 나오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이 자기 계발서의 종말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기 시작했으니 엄연한 학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이러한 흐름은 과학이 그 영역을 침범해서 자기 계발서 분야를 점차 초인주의나 일종의 종교로 밀어내기 시작된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책의 세상

지금 가지고 다니는 노트는 두 권이다. 한 권은 주식 투자에 대한 이력을 매일매일 기록하는 다이어리, 다른 한 권은 글감이 생각나면 적는 노트이다. 둘 다 매일 기록해야 하기 때문에 들고 다닐 뿐이다. 문장을 옮긴 노트는 책꽂이에 다른 책들과 함께 꽂혀 있다. 책은 인쇄가 되고 제본이 되어 서점에 뿌려지지만, 소유자가 생기기 전까지는 책은 생명이 없다. 내가 책을 구입해서 내 책꽂이에 꽂히게 되면, 그때 책은 태어난다. 책의 인쇄는 기록되어 있는 인쇄일에 이루어졌을지 모르지만, 내 책꽂이라는 세상에 태어난 건 내가 책꽂이를 지정해 주고 읽기 시작한 그때이다. 그런 책들만 모여 있는 책꽂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책꽂이가 곧 세상 전체이다. 그러니 후에 책꽂이에서 뽑혀나가 헌책방에 팔리거나 묶어서 폐지로 내놓아지는 책들은 세상을 떠나는 셈이다. 세상을 떠났으니 아쉽지만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던 책들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고, 나에게 의미가 있던 책들은 노트의 형태로 그 문장들을 남겨 나머지 책들 사이에 꽂혀 있다. 지금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에게 있어 그 노트는 그들의 선배들을 기리는 비석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모두 자신들이 사라지기 전에 이 세상(내 책꽂이)에, 비석(문장 노트)에 자신들의 일부(문장)를 남기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책을 귀하게 여기고 깨끗하게 보관하는 편이라서 극소수를 제외하면 모두 헌책방에서 취급을 할 테니 그 책들은 다시금 평온하고도 편식하듯 한쪽으로 쏠린 취향을 가진 책꽂이에서 벗어나 아무 편견 없는 드넓은 책꽂이와 창고에서 문화충격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저승에서 받는 시험 같은 것이라서 다른 주인을 찾아갈 수도 있고, 결국 폐지가 될 수도 있다. 주인을 현혹해서 함부로 밑줄을 받고 다닌 책은 결국 폐지가 되는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 끝까지 순결을 지킨 책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주인을 찾아 떠나겠지만 낡고 나면 결국 폐지가 될 것이다. 폐지가 되고 나야 새로운 주인을 찾아 새로운 책꽂이를 맞는 윤회를 끊고 책이 아닌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게 된다.


밑줄, 그 이후
이런 생각을 하면, 과연 책을 사는 게 맞는가 싶기도 하다. 양심적으로 생각해서 어차피 밑줄을 그어도 따로 보관을 한다면 책을 굳이 사서 책꽂이를 헤매 다니게 하지 말고 처음부터 전자책을 읽으면 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건 종이책의 종말이나 전자책의 시대 같은 관점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밑줄만 놓고 보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밑줄이 밑줄로 끝난다면 그 밑줄 친 문장들만 잘 모아두면 모두 해결된다. 하지만 밑줄이 밑줄로 끝나지 않을 때가 있다. 문장이 좋아서, 문장의 느낌이 좋아서, 문장의 힘이 나를 짓눌러서 밑줄을 긋지만 항상 느낌을 받기만 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사랑한다는 문장을 백 번 읽으면, '사랑...'이라고 한 번쯤은 되뇌게 되는 것처럼, 밑줄을 치면서도 너무나 격렬할 때에는 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러면 밑줄만 옮겨 적어서 되는 일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조차 밑줄을 긋고, 그 밑줄을 옮겨 적고 모으는 그 과정이 있기에 생기는 고민이다. 그리고 그 고민이 나를 글쓰기의 재미로 이끌어 주었다. 그 고민이 없었다면 밑줄에서 글쓰기로 가는 과정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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