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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10. 2024

인쇄된 책에 밑줄 긋기

밑줄의 의미


밑줄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책을 펼쳤을 때 밑줄이 주는 가장 첫 번째 정보는 이 책을 누군가는 이미 읽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누군가 펼쳐 보았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책을 두 가지 중 하나의 인식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읽었다는 사실이다. 두 가지의 가능성은 완전히 상반되지만 밑줄이 그어질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대략 가장 잘 취합해서 타낸다고 할 수 있고, 그 때문에 밑줄을 마주했을 때 우리의 반응을 잘 설명해주기도 한다.
밑줄은 우선 그 밑줄을 친 사람이 책을 분쇄해서 씹어먹을 것처럼 자세히 읽고 나서 그 내용의 핵심인 문장들에 마치 꼬리표를 달듯이 표시한 것일 수 있다. 책을 출판하면서 미리 그어서 인쇄하는 밑줄을 포함해서 원래 밑줄의 용도는 이것이 가장 알맞고 또 건전할 것이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실제로 이런 연유로 그어진 밑줄은 사실 몇 번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공공장소의 책에 그어진 밑줄은 두 번째의 경우가 절대적으로 많았는데, 바로 '책을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 데나 샤프로 그은 밑줄, 볼펜으로 그은 밑줄, 동그라미 친 단어들. 이런 밑줄을 발견할 때마다 책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새삼 들기도 하고, 이후에 읽을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심함에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모두 '표시를 남김' 자체에 대한 불만의 표출일 뿐, 밑줄 긋는 행위 자체에 대한 비난은 아니다. 공공도서관의 책에 밑줄을 남긴 것, 즉 공공의 재산에 자기만의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일 뿐, 책에 볼펜을 대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밑줄의 시작
돌아보면 나는 책에 뭔가 표시를 한다는 것에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다섯 살 때 기억 중, '오성과 한음' 이야기가 실려 있던 그림책을 읽는 장면이 있는데, 무엇 때문인지 책의 어느 부분에 볼펜으로 동그라미가 되어 있었다. 글자에 동그라미 친 것도 아니고 그림 어느 부분이었는데 그 동그라미가 보기 싫어 그 이후로 일부러 해당 페이지는 펼치지 않았다. 나름 깨끗하게 보려고 했는데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자존심 상했던 것인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책에 표시를 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때까지 교과서에도 딱히 표시를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는 반 친구들 모두 전과를 한 권쯤 가지고 있었다. 동아출판사와 교학사의 전과가 있었는데, 둘 다 가지고 있는 친구도 드물기도 했고, 교과서가 모두 국정 교과서였기에 어차피 내용이 똑같기도 했다. 지금은 여러 권으로 나누어서 가방 형태로 판매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모든 과목이 한 권에 들어 있어서 무척 두껍고 무거웠다. 시험기간이 아니고서야 집에서 교과서를 앞에서부터 다시 읽어야 할 일이 없기는 했지만, 그렇게 공부해야 할 때는 교과서와 전과를 나란히 펴 놓고 교과서와 해당 페이지에 해당하는 전과 페이지를 비교하면서 보았다. 모르는 것을 체크하고 다시 읽어 보라고 할 때, 표시는 전과에 하곤 했다. 그러고 보니 교과서 내용도 제도, 문제에 대한 대한 해답과 해설도 모두 전과에 있기 때문에 전과만 보아도 충분했을 텐데 왜인지 반드시 교과서를 먼저 읽고 나서 과를 보았다.
비 오는 어느 날, 지금의 판타지 소설에 해당하는 요정에 대한 책을 읽다가 이제 그만 놀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과를 꺼냈다. 아마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책을 읽었으니 이제 공부할 시간인데 밖에서 쏟아지는 빗소리가 무척이나 강렬했다. 비가 얼마나 쏟아지는지 하늘도 어두워서 점심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형광등을 켜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교과서에 밑줄을 쳤다. 몇 번이나 똑같은 것을 틀려서 전과에 표시를 해 놓았지만 그마저 효과가 없어서 교과서를 펴도 알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그러고 나니 산수 책은 어느 부분이든 마음대로 밑줄을 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연습문제 부분에 동그라미 세모 표시는 간혹 했지만 설명 부분에 표시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 6학년 때에는 숙하지는 않아도 여기저기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외워지지 않아서 표시하는 것이어서 샤프로 밑줄을 긋고 나서 외워졌다고 생각되면 지우개로 지우곤 했다. 이때까지 나에게 밑줄은 아직 어른 흉내를 내는 행동에 불과했다. 공부에도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미지수이다. 사실 나는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외우는 타입이어서 밑줄 그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는 것으로 잘 외워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책을 귀하게 여기지 말자
중학교 1학년 도덕 시간에 드디어 밑줄을 밑줄답게 책을 너덜너덜하게 만들 만큼 잔뜩 그어 보았다. 도덕 과목이라면 영어나 수학 과목에 비해 공부를 덜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도덕이라는 과목은 실제 도와 덕을 닦는 과목이 아니라 철학, 윤리 개념의 역사를 포함하는 과목이어서 의외로 외울 것이 많았다. 선생님이 '측은지심'이라는 대답을 바라고 '불쌍하게 여길 줄 알고 구하려고 뛰어들 수 있는 마음이 뭐냐'라고 물어보시는 질문에 '치근대심'이라고 해서 폭소를 터뜨렸던 한 녀석이 있었는데, 인류 사회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것을 단지 암기 과목으로 배우는 것은 담당 교사로서도 답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과서가 차근차근 설명하는 식으로 되어 있어서 반복해서 읽으면 외우기 조금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시킨 것이 '밑줄 그으며 읽기'였다.
"너희가 이 책을 다 읽으면, 기말고사까지 보고 나면 다시 펼칠 일이 있을 것 같아? 국영수면 또 몰라. 도덕책을 다시 읽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일이 있을까? 아니야. 교과서는 한 번 쓰고 버리는 거야."
라는 논리로 읽기 숙제를 시켰다. 읽기 숙제란 다음 시간에 배울 곳까지 페이지를 지정해 주면 다섯 번 읽어 오는 것이다. 단, 그냥 읽으면 안 되고 샤프, 빨간 볼펜, 파란 볼펜, 녹색 볼펜, 검정볼펜 등으로 한 번씩 그으면서 읽어야 한다. 어딘가를 표시하는 용도가 아니라 모든 문장에 밑줄을 쳐서 읽었다는 것을, 최소한 눈으로라도 지나가기는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용도였다. 요즘도 폐지 모으는 곳에서 공무원 수험서 같은 것을 보면 전체가 다 밑줄로 가득 찬 책을 보게 된다. 의외로 계속 읽기만 하는 다독법을 공부하면서 많이 쓰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그때, 책에 밑줄을 긋는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밑줄을 그으면 긋는 것이고, 내가 다시 읽을 일이 없다는 것이 확실한 책까지도 소중히 다룰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책을 바라보는 시선에서'책이라는 형태 자체가 만들어 주는 성역'을 걷어낸 것이다.


밑줄의 효용

책에 밑줄을 긋는 행위는 독서를 조금 더 적극적인 활동으로 만들어 준다. 독서라는 행위 자체는 눈으로 문장을 해석해서 의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지만 밑줄을 그으면 몸이 개입하는 활동이 된다.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적극적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 필요하지 않은 기관을 읽는다는 행위에 강제로 개입시킨다는 '의지'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정말로 밑줄을 긋지 않더라도 언제나 밑줄을 그을 수 있게 볼펜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집중력이 어느 정도는 올라가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밑줄은 교과서와 참고서에만 해당되는 활동이었다. 공부하면서 형광펜을 칠하기도 하고 밑줄을 치기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다면 이상할 것이다. 중학교 2학년을 넘어가면서 필기뿐만 아니라 참고서, 교과서까지 온통 형광펜과 밑줄로 가득 찼다. 필기를 참고서에 옮겨 적기도 하면서. 그때는 책을 사다 읽더라도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집에 있는 문학전집에는 볼펜이나 샤프를 대지 않고 눈으로만 읽었다. 특히 모든 부분이 연결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사건에 공모자 역할을 하는 소설의 경우에는 지금도 볼펜 하나 대지 않으려고 한다. 볼펜을 댄다면 밑줄 따위의 강조하는 역할이 아니라 주인공이 몇 살인지가 시간의 흐름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는 '모스크바의 신사' 같은 소설처럼 페이지 숫자 옆에 그 페이지에서의 주인공의 나이를 적거나 하는 정도이다.
책을 단지 즐길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그런 존재에서 내게 뭔가를 느낄 만한 문장을 던져 주는 대상이라고 깨달은 것은 고등학교에 가서였다. 용돈을 모아서 당시 동네에서 가장 컸던 경인문고의 지하에서 이것저것 도서관에서처럼 펼쳐 보다가 구입해 오면 보통 1,2 주는 읽었다. 더 빨리 읽어도 어차피 다른 책을 사러 갈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삼일만에 다 읽더라도 또다시 읽어도 문제가 없었다. 당시 그렇게 보다가 논란이 많은 소설 '람세스'를 한 권씩 구입했다. 그러고 보니 당시 가지고 있던 책들 중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책이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람세스도 이사를 다니는 과정에서 버렸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있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소설 람세스가 당시 문장들이 강렬해서 무척 인상 깊었다. 고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십자포화는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고등학생이 처음부터 서점에서 보고 '재미있으니 사야겠다'라고 할 만한 가격도 아니기도 했도, 표지도 딱히 고등학생의 눈에 재미있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자료 조사를 위해 갔던 도서관에서 신간이라고 하기에 읽어 보고는 재미있기도 하고 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구입한 것이었다. 그나마도 다섯 권이 다 나오기 전이어서 한 권씩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권을 구입할 수 있게 되기까지 몇 번을 읽다 보니 책을 펼칠 때마다 눈길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다섯 권이 다 모이고 나서도 내용의 흐름이 바뀌는 격렬한 부분을 읽을 때의 느낌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밑줄을 긋고 가끔 다섯 권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내용을 다시 되새기고 싶을 때, 빠르게 밑줄 친 부분만 읽었다. 밑줄 친 부분만 읽어도 주요 줄거리는 다 기억이 나기 때문에 한 시간이면 다섯 권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 숨겨진 와칸다를 엿보는 느낌이어서 굳이 세부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들여다볼 필요가 없어서이기도 했다.
그다음부터 집에 있는 단행본에 밑줄이 하나씩 쳐지기 시작했다. 다시 펼쳐 볼 때, 다른 부분은 읽지 않더라도 이 문장은 꼭 읽어야 한다, 싶은 문장들에 줄을 그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밑줄을 긋지 못했지만 대신 다이어리에 해당 책과 밑줄을 그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페이지를 적었다. 그러면 도서관에 다시 갔을 때나 그 책을 다시 빌렸을 때, 그 부분을 찾아서 읽을 수 있었다.


밑줄을 치며 책 읽기

제대로 의도를 가지고 밑줄을 치며 읽었던 책 중 '람세스'가 처음이었다면, 정점에 있었던 책은 '지식노동자 선언'이었다. 앞으로 지식노동자가 우위에 설 거라는 희망적인 내용이면서도 노동시장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한 책인데, 2000년대 초반에 인기가 꽤 좋았다가 갑자기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내 생각에는 지금까지도 책에서 말한 변동성의 상태가 가라앉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당시 그 희망적인 전망도 매력적이고 변동성의 상태를 기회로 사용하라는 문장들도 자극적이어서 이리저리 밑줄을 많이 쳤다. 20대 초,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중간에도 가까이 가 보지 않은 대학생에게는 사회, 경제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언젠가 나의 성공담을 장식해 줄 배경으로 보이는 법이다. 그러다 보니 몇 번이고 읽으면서 책의 중간중간에는 내 생각을 적은 종이도 끼워 놓았었는데 소설이 아니라 경제, 사회에 대한 책이다 보니 재미보다는 곱씹어 보아야 할, 지금으로 보면 자기 계발서 축에도 넣을 수 있을만한 그런 문장들이 많았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 적응을 했다는 생각과 함께 취업을 고민하기 시작하는 시기, 동시에 휴학으로 시간이 넘쳐나던 시기에 만난 책이어서 세 번째쯤 읽으면서 밑줄을 치기 시작했다. 여러 번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다시 읽으면서 감탄을 했다.
지금 그때 밑줄을 쳤던 그 책은 없다. 대신 누군가 그은 밑줄이 서너 개 있는 다른 책이 책꽂이에 꽂혀 있다. 대학 시절 빌려주었다가 받지 못했는데 누구에게 빌려준 것인지를 기억해내지 못해서 밑줄을 그은 부분을 다시 읽으면서 내 생각을 적었던 노란 종이만 대학 졸업 후에도 한동안 방 책꽂이 어딘가에 굴러다녔지만 그마저도 결국 사라져 버렸다. 그로부터 이십 년 정도가 지나고 헌책방에서 다시 구입을 했는데, 다시 읽어 보아도 굳이 갑자기 잊힐 이유는 없는 것 같기는 하다. 그렇지만 지금의 시선으로는 다시 밑줄을 치면서 읽을 정도는 되지 않아 보인다.

밑줄의 기준

밑줄을 치는데 원칙이 있다면, 이미 여러 번 강조했지만, 언제 밑줄을 치는지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서너 번은 읽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너 번 읽을 만한 책이 아니라면 밑줄을 그을 이유가 없다. 어차피 다시 읽지도 않을 책에 다시 읽을 때 참고하라는 의미의 밑줄을 긋는 것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처음 읽으면서 습관적으로 '이거 괜찮네?, 저것도 괜찮네?' 하면서 밑줄을 그을 수도 있고, 그런 건 개인의 스타일에 따른 것이라 내가 관여할 바 아니지만 내 경우에는 '다시 그 페이지를 펼쳤을 때 눈이 한 번에 갔으면 하는 부분'에 표시를 한다. 그러다 보니 꼭 밑줄이 아니더라도 형광펜도 상관없고, 책 전체에서 특정 부분의 열몇 페이지가 핵심이다 싶을 때는 아예 그 부분에 해당하는 앞마구리(책배) 부분 전체를 칠해서 표시하기도 한다.
지금도 밑줄은 간간히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어서 다른 방식들을 계속해서 소개하겠지만, 밑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책들이 있다. 그런 책들은 리디 셀렉트나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다가도 새로 구입을 한다. 밑줄이 필요하다는 것은 나에게 그 책을 소유할 필요가 있다, 표시를 해 두고 다시 읽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충동구매했다가 헌책방에 헐값으로 팔아넘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되도록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서점까지 가서 직접 훑어보기만 했어도 구입하지 않았을 책을 인터넷 서점이어서 충동주문하는 경우가 간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도서관에도 풀리지 않고 리디에도 올라오지 않으면서 서점에서는 비닐에 포장해서 내놓는 책은 절대 선택할 수가 없다.


밑줄의 목적

내가 밑줄을 치는 것은 책을 나중에 조금 더 빨리 읽기 위해서이다. 핵심 부분만 보고 싶어서. 또한 제대로 친 밑줄이라면 밑줄 부분에서 시작해서 앞뒤로모두 다시 읽을만한 내용이 된다. 내 밑줄에 다른 누군가가 펼쳤을 때 이 부분을 꼭 읽었으면 싶어서, 같은 의도는 없다. 나는 내 책에만 밑줄을 그을 뿐이고, 책에 행하는 모든 행위는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한 일일 뿐이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표시하는 행위를 굉장히 싫어한다. 그렇게 되어 있는 책이라고 해서 더 읽지 못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았으면 싶은 생각도 당연히 든다.
또, 밑줄을 그은 책은 몇 번이고 읽은 책이기 때문에 내용과, 물리적으로 그 책을 읽을 때의 경험이 너무나 생생해서 그 책을 버리더라도 결국 다시 사게 되는 경우가 있다. 람세스는 결국 다시 구입하지 않았지만, 지식 노동자 선언, 빵장수 야곱 같은 책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시 구입하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밑줄 때문이 아니라 밑줄이 없어도 되는 다른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밑줄을 긋는 행위는 능동적인 행위이고, 따라서 책 읽는 과정을 조금 더 능동적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볼펜으로 밑줄을 그을 준비를 하고 책을 읽으면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다. 애초에 집중할 생각이 없는데 강제로 붙들어줄 수는 없지만.


밑줄 긋는 요령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밑줄을 그을 때와 긋지 않을 때 책을 읽는 모습이 매우 다르다. 밑줄을 그을 때는 자를 대고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자를 한 씩 내려준다. 밑줄을 그을 때는 반드시 자를 대고 긋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줄을 서너 번 긋고 나면 자를 휴지로 잘 닦아준다. 알코올솜이라던가 그런 고급 사무용품이 비치되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진 않고, 스테인리스로 된 15cm 자로 밑줄을 긋고 한 번씩 휴지로 닦아준 다음, 가끔 생각이 나면(책을 읽지 않을 때) 물로 씻어주곤 한다. 그리고 밑줄을 긋지 않을 때는 양손으로 양쪽 페이지 가장자리 하단을 누르고 얼굴은 마치 책 속으로 빠져들 것처럼 가까이하고 글을 읽는다. 옛날 수능 문제를 풀면서 생긴 습관인데, 이렇게 하면 눈동자만 굴려서 읽는 속도와 집중력을 조금 늘릴 수 있다. 속도를 얼마나 늘릴 수 있느냐 하면, 이미 20년도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수능 시험 때 이 방법으로 언어영역을 세 번 풀 수 있었다.


밑줄보다 중요한 것은 많이 읽기

책을 몇 번씩 읽는 것으로 모자라 계속 문장을 곱씹을 수 있는 장치로서의 밑줄을 내 손으로 긋게 된 것은 내가 글을 쓰게 된 첫 번째 단추였다. 밑줄이 글이 되는 과정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밑줄을 긋고 십 년이 지나도록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십 년이 지나고 생각을 풀어나가게 되면서 조금 더 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은 글을 쓰지 않고는 차분하게 생각을 하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상태가 되었다. 차분하게 생각을 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생활은 90%가 외부와의 접촉이다. 글을 좀 쓰지 않는다고 해서 외부와 접촉이 원활히 되지 않을 리는 없다. 차분한 생각은 나의 정신을 다듬는 일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외부의 힘에 떠밀려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라면, 차분한 생각은 내가 '내가 아는 나'로 머물러 있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늘 변하겠지만, 그 변화 안에서도 나름 유지되는 나만의 정체성을 수립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글을 쓰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이 다른 사람 앞에서 숫기가 없었지만 스스로를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고, 그래서 숫기가 없던 그 상태 자체가 스트레스였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도 글을 쓰면서였다. 그러니 그 과정은 스스로에게도 한 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밑줄을 긋는 것이 그 시작이라는 것은 상징성이 굉장히 크다. 무조건, 일단 글을 써야 한다는 말보다 앞서는 것이 밑줄을 치며 일단 많이 읽어보라는 것이니까. 나는 많이 읽는 것뿐만 아니라 필사도 필요하다는 데에 무척 찬성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필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이면 그 책을 두세 번 더 읽는 것을 추천하고 싶기는 하다. 그래도 어쨌거나 밑줄을 치든 필사를 하든 읽는 것은 읽지 않는 것보다 백배 천 배 나은 일이다. 몇 년 뒤 자신의 손에서 나올 글을 상상한다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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