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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p L Jun 24. 2024

연필을 따라 서걱서걱

책에 밑줄을 그으며 다시 읽고 싶은 부분을 표시하고 다시 읽으면서 그 부분을 옮겨 적는 작업은 책을 한 번 읽는 것보다는 짧은 시간이 걸리면서도 옮겨 적으면서 느끼는 것은 단순히 반복해서 읽기만 할 때보다 훨씬 깊기 때문에 책을 이해했다는 성취감 같은 것이 있다. 정말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에게 필요한 만큼은 빼내어 저장해 두었다는 것이 뿌듯한 것이다. 저자가 설명하고자 한 것, 독자가 읽으면서 이해했으면 한 것, 느꼈으면 한 것들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독자가 그 책을 구입하면서 원했던 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얻어갈 수 있는 것의 최대치'에서 적당한 부분만 얻어가는 것이었다면 그 정도로도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밑줄을 치고 옮겨 적은 문장들을 보면 내가 봐도 실제로 저자가 하고자 한 말은 별로 없다. 소설처럼 인문학 책을 읽을 때에도 밑줄은 저자가 논리를 펼치는 것을 따라가는 그 과정에서 감명을 받고 골라낸 문장들, 새로운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필요성과 그 새로운 관점에서보이는 것들에 대한 설명들이 많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밑줄을 긋는다고 생명의 핵심이 DNA라는 데에 밑줄이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옥불이라는 아이디어는 단순히 그 자체가 갖는 강렬한 심리적 충격 때문에 불멸의 존재가 된다.(p.373)'같은, 저자가 강조하고 싶었던 문장은 전혀 아니었던 곳일 수 있다. 강조하고 싶지 않았던 문장까지는 아닌 것 같고, 내가 보기에는 단순히 논리가 흘러가는 중간에, 어떻게 보면 '꼬투리를 잡듯이' 밑줄을 그은 것이기에 그 문장은 '길목'이지 '장소'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단순히 내가 그 문장으로 인해 뭔가를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문장은 수집할 가치가 있다.
이기적 유전자는 아직 밑줄도 긋지 않았다. 한 번도 제대로 읽지는 않은 것 같다. 너무 많은 연구와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 많아서 관심이 갈 때는 틀림없이 꼼꼼히  책이라 버리지도 못하면서 읽지도 않고 잘 꽂아 두었다. 반면 '불안의 서'는 밑줄을 그을 부분이 너무 많아서 시작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단순히 뭔가를 배운다기보다 공감하는 부분만 찾아도 그 정도이다.
처음에는 밑줄 그은 부분을 그렇게 노트에 옮겨 적으면 책 없이도 노트만 펼치면 내용을 되새겨 볼 수 있다는 단순한 목적이었다. 그렇다고 몇십 권의 책이 노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책 전체를 서너 번이나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몇 권 되지도 않고, 그렇게 읽었어도 밑줄이 한두 줄에 불과해서 옮겨적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밑줄은 잔뜩 그었지만 옮겨적기 귀찮아서 놔둔 적도 있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러다가 밑줄을 옮겨적던 노트는 2008년도에 끝난다. 약 10년 정도만 사용하던 것이다. 지금도 오랜만에 펼쳐 보니 노트가 내가 좋아하는 두툼한 종이로 되어 있어 넘기는 맛이 난다. 문장들을 읽어 보면, 그런 문장들을 옮기다니 내가 적은 것이 맞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마지막에 옮겨 적은 것은 책이 아니라 문학동네 카페에서 공개했던 정민 교수님의 글 몇 편이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이 책으로 나오기 전 임시로 공개하셨던 내용에 부록처럼 들어가 있던 이었는데, 실제 그 책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록 글을 통째로 베껴서 노트에 옮겨 두었다. 다시 읽다 보니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2008년, 그렇게 글을 옮겨 쓰는 일이 툭 끊기기 전에, 그 해 중순부터 다른 기록이 생겼다. 매우 두꺼운 검정색 수첩.10% 정도만 쓰다가 다른 수첩으교체해서  2011년 11월까지 3년 동안 사용하던 수첩인데 아마 두께 때문에 들고다니기가 힘들었던 것이 이유였을 것이다. 수첩의 첫부분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발췌한 문장들로 시작했다.

니콜로가 그에게 "아버지가 누구신가?"하고 물었다. 피에로는 젊은이들이 흔히 하는 방식으로 대답하였다. "저는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니콜로가 말했다. "그런 아버지의 아들로 이렇게 잘 생긴 외모를 가지고서 라틴어를 모른다면 부끄러워해야만 하네. 그것은 자네에게 아주 훌륭한 장식품이 될 것이니 말이야. 자네가 그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자네는 아무것도 자랑삼을 것이 없을 것이며, 게다가 젊음의 꽃이 시들어버리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네."... 지금까지의 사치스러운 생활 대신에 그는 밤낮으로 공부를 했고 모든 교양인들과 생각이 높은 정치가들의 친구가 되었다.(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p.268)

그리고 그 밑에 덧붙이기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내가 처음으로 나의 생각을 주석으로 만들 생각을 한 책이다."라고 썼다. 아마 그때까지는 밑줄 외에는 책에 어떤 표시도 할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그때는 메모를 해도 간혹 사람 이름이 나오면 설명을 적어두기는 했어도 생각을 적는 건 별로 없었다. 혹시 헌책방에서 내가 메모를 남겼던 그 책을 다시 찾으면 무척 반가울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다시 구입할지는 모르겠다 싶을 만큼 주관적인 생각보다는 관적인 역사 표시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수첩을 만들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수첩에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직전, 그러니까 그 수첩의 서문에 해당하는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문장을 썼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책들이 발췌나 감상의 기록도 없이 나를 지나쳐 갔다. 그럴 만한 책이 많기는 했지만 대학 시절 이미 발췌가 이루어지지 않은 책이 많았다. 하지만 실제 발췌를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와 별개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 가면서 내 손으로 옮겨 적을 만한 가치가 있는 문장인가를 고민하던 그 때가 나의 정신이 가장 긴장되고 희열을 책에서 느꼈던 유일한 때였던 듯 싶다. 지나간 책 중 다시 소화할 만한 책을 선정해서 발췌할 이유는 충분하리라 본다. 한 때 모든 책을 한 권당 열 번을 읽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질문이 같은 부분을 읽을 때 반복된다는 보장이 없으니 의미심장한 구절, 감명깊은 구절, 이해가 가지 않는 구절, 명확하지 않은 구절, 의문이 생기는 구절은 옮겨 적는 편이 나 자신의 성장에 더 도움이 되리라 본다.

이후로는 일기도, 인상 깊은 구절도, 그리고 그 구절들에 대한 내 생각도 마구 섞여서 나온다. 지금 생각으로는 옮겨 적는 노트는 그대로 유지하되 내 생각에 대한 기록만 수첩에 따로 하면 어땠을까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읽는 일이 쉽지는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해 놓았어도 딱히 의미는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이렇게 밑줄에서 밑줄 그은 부분을 옮겨 적은 노트를 운영하는 것까지는 결국 같은 것이고 그 이후로 내 생각을 적을 수첩을 마련했다는 것에 큰 발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수첩의 내용은 결국 천편 일률적이다. 무슨 일이 있었다, 밑줄 그은 부분은 이렇다, 그 부분들에 대해서 내 생각은 이렇다 등등. 그렇지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용보다도 수첩을 마련하게 된 계기이다. 이 때에야 아직 밑줄을 옮겨적는 노트에 생각을 함께 적는 정도로도 충분할 수준이라고 생각되지만 굳이 새로운 수첩을 마련한 것은 일상에서 책 내용외에도 쓰고 싶은 내용이 생겼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전의 밑줄을 옮겨적는 노트와는 다른 새로운 용도가 생겨난  시기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내가 글쓰기에 대한 욕구가 구체적으로 생겨난 것이 이때였다고 생각한다. 어떤 작가도, 어떤 사람도, 메모광조차 어떤 계기로 펜을 들게 되었는지 나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나의 경우에는 남의 글을 옮겨 쓰다 보니 내 생각도 기록해 두고 싶다는 욕망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노트에 생각을 적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전까지는 내 생각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 아이디어를 가지고 기록을 하든 무언가를 해야 막상 몇 분 뒤에 적으려고 하니 잊어버렸다, 같은 것을 깨달을 수 있을텐데, 생각이 나면 그뿐,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고 마는데 일상과 관계 없는 생각이 빨리 사라지거나 늦게 사라지거나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책이 나에게 글을 쓰게 했다는 것이었다. 책에 밑줄을 긋다가 그 밑줄이 어느 날 노트가 되고 그러던 어느 순간에, 마치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나듯이 밑줄을 적는 노트가 내 생각이 들어가는 수첩으로 전환이 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뭔가를 쓰고 그것을 다시 읽는 행위가 주는 비밀스러운 작용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요즘 나오는 필사 노트는 꽤 괜찮은 시도인 것 같다. 딱히 밑줄 노트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차라리 필사 노트로 글을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나는 직접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문장의 힘을 키워준다거나 하는 작용에 대해서는, 실제로 해 보면 뭔가를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예상은 하지만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손으로 직접 쓰든, 자판을 두드리든, 글을 옮겨 쓴 후 그것을 다시 읽는 행위는 생각의 흐름과 틀을 어느 정도 잡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단, 다시 는 행위가 핵심이다. 다시 읽어 보지 않는 글은 소용이 없. 내 손으로 쓴 것을 내 눈으로 읽을 때에만 생기는 작용이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같은 문장이라도 인쇄되어 나온 책과 내가 직접 입력하거나 손으로 쓴 문장 막상 내 눈으로 읽을 때는 다르게 다가온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 원리를 파악하려 기보다는 우리는 그저 그 선물을 즐기면 되는 것이 아닐까?
밑줄을 옮겨 적는 것도 책을 몇 번이나 읽어야 하기 때문에 빠른 작업은 아니 결과물은 두고두고 사용할 수 있다. 반면 생각만 적글은 들이는 시간에 비해 많은 생각을 적어 내려갈 수 있, 아이러니하게도 때문에 결국 다시 읽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다시 읽고 싶은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언제 쓴 글인지 말고는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작년 여름에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글을 찾으려면 2023년 6월부터 기록을 일일이 읽어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몇 번이고 계속 읽지 않으면 아예 읽을 일이 없는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그때는 고등학교 때 오천 원을 주고 구입한 제도샤프를 가지고 글을 썼다. 당시에는 거금을 들여 마련한 샤프였어서 이후에도 뭔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일에는 항상 사용하샤프였는데, 역시나 노트의 처음부터 함께 한 것이다. 구입한 지 10년도 넘었지만 불편함이 없었고, 지금은 이미 그 시점에서조차 16년이 지났으니 사골까지 우려먹는 격이라고 할까.
그때 사용하던 검은 수첩은 페이지가 많아서 두꺼운 것도 있었지만 내지도 내가 좋아하는 두툼한 종이로 되어 있었다. 풀칠을 해 가며 스크랩을 해도 될 정도의 종이였다. 약간 거친 듯한 두꺼운 종이에 샤프로 글을 쓰는 느낌은 무척 좋았다. 샤프 끝에 걸리는 종이의 느낌과 표지가 넘어가지 않게 잡고 있는 왼손의 촉감도 글을 쓰는 환경만들어 주었다. 지금은 다시 연필이 인기를 끄는 시기인 것 같다. 얼마나 오랴 걸 유행안지 모르겠지만 나도 로로이 연필을 몇 자루 가지고 있는데, 솔직히 이야기하면 사용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깎아놓지도 않았다. 수첩을 다시 쓰게 되면 사용할까 했는데, 좀처럼 써지지 않다. 지금은 샤프나 연필보다는 부드러운 종이에 굵은 잉크로 쓰는 것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향은 언제나 바뀌는 법이니 언젠가 종이와 연필을 필요로 하는 시기가 오겠지, 하고 생각은 한다.
어디에 나가게 되면 가방에 항상 표지에 샤프를 꽂은 두꺼운 수첩을 챙겼 출근을 해서도 틈틈이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한두 줄은 적고는 했다. 그러다가 수첩을 바꾸게 된 계기가 몇 번에 걸쳐서 생겼다.
수첩을 바꾸게 된 것은 글을 쓰고 쓰지 않게 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수첩은 말했듯이 지금도 이어지는 나의 글을 쓰고 아이디어를 적는 핵심 전략자산이다. 을 사용하는 일은 중간에 새로운 방식으로 바뀌는 일은 있어도 끊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상한 상사를 만나 퇴근 후에도 시간이 없어서 아무것도 적지 못한 적은 있지만, 그것은 내가 자의로 끊은 것이 아니라서 상사가 바뀌자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가장 큰 변화는 볼펜을 쓰게 된 것이었다. 연필의 서걱서걱 하는 느낌은 좋지만 과거에 쓴 글을 읽을 다시 읽어야 할 때가 있어서 넘겨보고는 했는데, 몇 번 반복하다 보니 글자가 번지는 페이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부는 너무 번져서 지금읽기 힘 지경인 곳도 있다. 언젠가 디지털로 옮기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매일 그 날의 기록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서 책을 읽을 시간을 희생해서 과거의 글을 보는 일은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연필 글씨가 번진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샤프심에 관심이 전혀 없다가 중간에 HB에서 2B로 바뀌면서 벌어진 일인 것을 확인하고 다시 HB 샤프심을 구입해야 했다. 내가 원래 샤프심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 회사에서는 샤프를 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샤프로 뭔가를 쓰는 것을 보면 신기해하면서 나에게 샤프심을 가져다 주고는 했는데 무슨 심인지 확인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딱히 굵게 나오든 가늘게 나오든 상관하지 않았던 터라 습관대로 했을 뿐이지만, 거친 종이에 쓴 상태에서 자주 들춰 보다 보니 점점 반대쪽 종이와 마찰이 생기면서 비벼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샤프심을 HB로 바꾸자 처음의 서걱서걱한 느낌이 돌아온 것 같아서 반갑기는 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펼쳐 보아도 번진 부분은 보기에도 부드럽게 써 있고 번지지 않은 부분은 마치 칼로 새긴 것 같은 흔적이 글씨에 나 있어서 그 둘은 단지 샤프 종류의 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사용하던 샤프심만 다쓰고 나서 결국 볼펜으로 바꾸기로 했다.
그 전에는 날짜를 적을 때도 있고 적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밑줄을 옮겨 적을 때에도 그 책에 대해 처음 쓰기 시작할 때의 날짜를 적었다. 하지만 생각을 적을 때는 오히려 동그라미만 치고 쓰거나 하는 일이 잦았다. 어차피 다음에 날짜를 적게 되면 그 사이에 들어가 있어서 언제쯤인지 알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런 생각끝에 그렇게 했다기보다 그냥 귀찮아서 그랬다는 편이 솔직할 것이다. 지금은 날짜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는 입장이지만 글과 상관이 없는, 단지 일상의 생각을 적을 때는 날짜를 적는다. 글감의 경우에는 어차피 글을 쓸 때 날짜를 표시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날짜를 적을 때는 같은 날이라도 주제가 바뀌면 동그라미를 분명하게 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읽으면서 이어지는 내용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다른 말을 하고 있어서 덮어버리는 일이 반복될테니까. 어차피 내 수첩이라서 그렇게 되면 내가 동그라미를 쳐도 되지만, 실제로 다른 글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왔다갔다하는 그런 글이었을 때도 있어서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샤프로 쓸 때는 지우개로 지울 수 있어서 그나마 자유도가 있었던 것 같다.
샤프에서 볼펜으로 필기구가 바뀐 것은 2009년 7월이었다. 6월23일 피타고라스 정리에 대해 최초의 아이디어가 기록이 되고 역사속에 남게 되기가지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에 대한 이야기 바로 다음에 7월 7일 볼펜으로 쓴,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무언가 쓰기는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다음에 읽으면 차분해지는 이런 노트가 아니라 똑바로 드러낼 것은 드러내는 출판물 이야기다.

딱히 필기구를 샤프에서 볼펜으로 바꾼 이유에 대해서 쓴 글은 없다.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나 보다. 하지만 나중에 번지지 않도록 필기도구를 변경했다는 점은, 내가 내 글을 나중에 다시 읽을 것이라는 것을 소극적이지만 공식적으로 확신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간간이 나중에 출판을 하면 어떨지에 대한 상상을 써 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이런 글을 썼다. 수첩을 바꾸기 며칠 전, 12월12일이다.

처음의 목적은 그저 순수한 기록에 있었다. 기록의 나라 조선에서와 같이, 결국 남기면 남기지 않은 것보다는 낫다는 교훈으로 그저 기록을 한 것이다. 생각을 남기고 경험을 남긴다. 이것은 부끄러운 기록이 될 수도 있고 후에 눈물을 흘릴 기억이 될 수도 있으며, 결과를 모르고 그저 써내려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난한 작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한 장 종이는 현실이다. 머릿속에만 존재할, 재생 불가능한 기억을 물리적으로 종이에 옮기는 것은, 기록되지 않는 몸짓에 불과한 행동들을 이 세상에 진정으로 새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 하나 보고 말 수도 있는 기록에 이처럼 큰 의미를 두는 것은 또한 세상에 족적 하나 남기고 싶지만 힘이 없는 한 사람의 눈물이다. 다른 여러 사람의 생에, 이 나라에, 이 세상에 부각되지 못한다면 이 한 권에라도 온전히 새기리라.

처음과 끝. 수첩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의 생각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던 때에 쓴 것수첩이 끝낼 때 나만의 기록이라는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을 때 쓴 글의 차이가 확연히 보인다. 이 때가 내가 글을 쓰고 싶다, 글을 써야 한다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게 된 시기라고 각한다. 언제부터라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첫 번 수첩을 쓰던 시기 중 언젠가가 글쓰기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생기 시작한 시기라고 말할 수는 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생에서 안개 같은 구역을 자주 지나갈 수밖에 없다. 처음 보는 것은 모두 그 뒤가 보이지 않는 법이다. 아니, 우리는 어떤 것도 눈앞에 있는 것만 볼 수 있다. 그 뒷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고 단지 경험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 기억은 우리의 본능에 새길 수도 있지만 기록으로 남길 수도 있다. 그 무엇도 결국 습관이다. 본능에 새기는 사람은 삶이 좀더 민첩해질 것이다.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은 어떨까?
샤프로 글을 써 나간 것은 내게 하나의 시작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것은 글쓰기 자체가 스스로 가지는 가치이지 내 인생에 효용성을 주는 그런 의미에의 가치는 아니다. 내 인생에 진정 도움이 되기 시작한 것은 수첩과 노트를 조금 더 잘 활용하기 시작하면서였다고 생각한다. 수첩을 주관적인 생각을 적는 데 조금 더 할애하기 시작한 시기. 검은 수첩에도 중간에 책에서 발췌해서 적은 부분이 보인다. 아마도 그 전부터 쓰던 발췌 노트를 사용하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후에 해가 바뀌고 노트를 교체하면서 새로운 구도가 자리를 잡았다. 책에 밑줄을 긋는 것은 그대로였던 것 같은데, 밑줄을 여러 군데 긋고, 버리지 않을 책이 되면 모두 옮겨 적는 대신 표시만 하게 된 것이다. 밑줄을 옮겨 적지 않더라도 내가 쓰고 싶은 내 생각들이 충분히 많아졌기 때문이다. 밑줄을 긋고, 짧은 글을 쓰고 대신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수첩에 쓰는, 그런 하나의 구조를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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