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의 한나, 그리고 마이클
애초에는 아주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문맹이었던 여자가 예전 연인이 보내준 책을 읽으며 죄를 깨닫고 그 책을 밟고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이야기. 그러나 다시 본 ‘더 리더’는 온통 사랑으로 읽힌다. 그 사랑에는 자존심, 고집, 괜찮을거라는 오만이 한데 뒤섞여 있다. 그 사람이 인생에서 제거되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거라는 믿음, 버려지기 전에 먼저 외면해버리는 두려움도 포함이다.
한나는 쉽게 웃지 않는 꼿꼿하고 거친 여자다. 퇴근길에 누가 구토한 흔적을 보고 화내며 바로 청소해버릴 정도로 시민의식도 뛰어나다. 그러나 구토한 당사자 마이클을 발견하고 민망하고 미안한 나머지 그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친절을 베푼다. 마이클의 부모는 배운 집이지만 냉랭하다. 그의 어머니는 다정한 손길 한 번 주지 않는다. 마이클이 성홍열 진단을 받았을 때 전염병이라는 것을 알고 그의 어머니는 다급하게 자리를 피한다. 걱정하는 여동생에게 이리 오라는 명령 뿐, 어머니는 자식들을 어루만지는 법이 없다. 마이클은 아픈 자신을 안고 달래주던 한나를 잊지 못한다. 찾아가고, 또 찾아가고. 한나는 양동이를 주며 창고의 석탄을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집안에 들어올 수 있는 빌미를 준 한나는 마이클이 더러워진 채 들어오자 처음으로 깔깔 웃는다. 그를 위해 욕조에 물을 받으며 한나는 마이클을 껴안는다. ‘이걸 원했지?’ 라면서.
마이클은 학교가 끝나고 한나의 집에 가는 것이 즐거움이다. 늘 성급하게 달려드는 그를 제지하며 한나는 ‘천천히’를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으로 충만해진 마이클은 한나가 보고 싶어서 그녀가 일하는 전차에 올라탄다. 혼자만의 기쁨에 마이클은 한나가 반겨줄것이라 기대하지만, 한나는 굳은 얼굴로 그를 외면한다. 마이클은 그녀의 외면이 아프고, 한나는 왜 내가 탄 전차가 아닌 옆 칸에 탔냐고 화낸다.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이고 반겨줄 줄 알았다는 마이클의 말에, 한나는 무력해진다.
그녀와의 만남이 익숙해지던 그 때, 마이클에게 신경쓰이는 여자애가 생긴다. 학교 끝나고 그 여자애와 수영하는 것이 마이클의 일상이 되었고, 깜짝 생일파티가 준비되어있다던 그 어느날에도 마이클은 유혹을 물리치고 한나에게 향했다. 그 희생을 한나가 알아주고 칭찬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한나는 ‘네 친구들에게 돌아가’라며 마이클의 등을 떠민다. 한나는 문맹인 것을 들키기 싫어했다. 그녀를 높이 평가한 상사가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게 기회를 주었지만, 한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짐을 챙겨 떠난다. 유일하게 그녀를 붙잡았던 것은 마이클이지만, 그도 이제 또래에게 보내줄 때가 되었다.
여느날처럼 한나의 집에 왔던 마이클은, 텅 빈 집을 마주하고 절망한다.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새고 집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마이클을 어루만지려 하지만, 마이클은 단호하게 그 손길을 거부한다. 마이클은 따뜻한 그녀의 욕조가 아닌, 여름이 끝난 추운 호수에서 발가벗고 물 속에 잠기며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전범재판에서였다. 범죄자를 변호하는 것이 무엇인지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교수는 마이클을 실제 재판 현장에 데려가고, 아우슈비츠에서 감시자로 일하던 한나는 수많은 포로를 불타던 교회에서 죽게 한 죄로 법정에 서 있다. 원치 않는 재회 앞에서 마이클은 멀쩡한 척 하려 애를 쓴다. 가식적으로 웃고 괜찮은 척 하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한나에게 가 있다. 여전히 한나는 꼿꼿하고 책임감 있다. 그녀는 감시자이므로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서 가둬둔 교회에서 그들을 풀어줄 수 없었노라고, 판사에게 '달리 뭘 할 수 있었을까요?' 라고 되묻는다. 글을 몰라서 그녀의 동료들이 자신들의 죄까지 다 한나에게 떠넘길 때, 한나는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감내하고 책임지는 것. 덕분에 한나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마이클은 그녀가 문맹인 것을 눈치채지만, 그녀를 외면한다.
그녀를 면회하러 가면서, 마이클은 문맹인 것을 밝히고 다른 사람처럼 감형받으라고 설득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 문턱에서 마이클은 돌아선다. 그를 좋아하던 동급생과 밤을 보내면서 마이클은 결심한 것 같다. 다른 삶을 살 것이고, 인생에서 ‘한나’라는 이름은 지워버리기로. 늘 궁금했던 한나는 마이클과 헤어져 아우슈비츠의 감시자로 일했고, 지금은 나오지 못하는 감옥에 있다.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어떤 죄를 저질렀고, 지금 어디 있는지 결말을 알았으니 마이클은 성급하게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거라고 자신한다.
그러나 어린 딸과 함께 돌아간 옛 집에서 마이클은 한나에게 보낼 테이프를 녹음하기 시작한다. 그녀에게 책을 읽어줬던 것처럼, 마이클은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녹음해 한나에게 보낸다. 한나는 그 녹음테이프를 들으며 글을 배우고 마이클에게 쪽지를 보낸다. ‘로맨스를 더 보내줘’ 그러나 마이클은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싸늘한 어른이 되어있었고, 그녀의 쪽지를 무시한다.
다시 몇 십년이 흘러, 마이클은 전화 한 통을 받는다. 한나의 출소일이 다가오고 있고, 가족 친구 아무도 없기 때문에 사회 정착을 도와주면 좋겠다는 교도소 측의 전화. 마이클은 망설이다 한나를 만나러 간다. 좋진 않지만 집도 구했고, 일할 곳도 구했다고 말하는 마이클에게 한나는 다른 것을 기대한다. 그의 다정함. 그러나 마이클은 죽은 사람들에게 미안하지 않냐고 묻고, 한나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뿐’이라고 말한다. 마이클은 출소일에 데리러 오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한나는 냉랭한 그의 태도에 다시 그의 인생에서 사라지기로 결심한다. 오랜 세월, 그녀가 읽었던 수많은 책을 발판으로 그녀는 목숨을 내던진다. 마이클을 보았으니 이것으로 되었다는 체념처럼.
마이클은 내심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될 날을. 좋지 않다고 얘기했던 한나의 새집은 아늑했고 그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죽음의 오열한다. 마이클은 한나가 남긴 유언대로 전 재산을 아우슈비츠 피해자에게 전달해주기 위해 법정에서 한나의 죄를 고발한 여인을 만나러간다. 거기에서 마이클은 처음으로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문맹이었고, 보고서를 쓴 책임자도 못된다고 변호하는 마이클. 여인은 한나의 전 재산이 담긴 오래된 차 깡통을 갖겠다고 얘기한다. 차 깡통에 소중한 것을 담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차 깡통이 소중해서 그 안에 보물을 담은 것 같다고 말하는 여인.
마이클은 한나가 저지른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한나가 말없이 자신을 버리고 떠난 것을 평생 용서하지 못했다. 차 깡통이 좋아서 그 안에 소중한 것을 담은 것처럼. 마이클은 그녀를 사랑해서 소중한 마음을 그녀 안에 담았다. 한나는 어린 연인에게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그를 떠났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지 않기를 바랬다. 마이클은 이제 어른이니까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한나 앞에서는 무력한 어린애가 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한나에게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싸늘한 어른처럼 굴어보지만 언제나 지는 것은 마이클이다. 그는 성인이 된 딸에게 평생 사랑했던 여인, 한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해방된다.
한나는 꼿꼿하게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친구, 가족 아무도 없이 혼자 살아남아 자신을 돌보는 것 외의 것을 하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 그녀 혼자의 삶은 이럭저럭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마이클이 갑자기 끼어드는 바람에 모든 게 엉망이 됐다. 그녀는 가질 수 없는 것을 갈망하고 행복을 꿈꾸었다. 인생이 그녀 통제 밖으로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마이클을 버렸다. 애써서 다시 혼자의 삶으로 되돌아왔으나 외로운 기분은 더 진해졌다. 면회온다는 그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말없이 책을 읽어주는 그에게 메시지를 기다린다. 그러다 그에게 감정적으로 버려졌을때 또 사라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를 봐달라고 매달리지 못한다. 늘 용서를 비는 것은 나라고 외쳤던 마이클에게 절망감을 주고 그녀는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자신답게 살기 위해 많은 것을 놓친 그녀의 꼿꼿한 등을 쓰다듬어주고 싶은 이유다. 기쁨도 없이 의무만 가득했던 그 삶.
마이클이 한나에게 책을 녹음해 보낼 때, 첫 책으로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선택한다. 이 책은 가식의 삶을 살아가면서 부도덕하다고 알려질 사랑의 아픔에 괴로워하는 연인에 관한 이야기다. 여름의 해프닝이라고 생각했지만 결코 추억이 되지 못하고 평생 그리워한 연인. 한나는 이 책을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