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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키보드 취미를 했다면, 무엇을 사용했을까?

호랑이 납땜하던 시절 이야기

by 루습히

키보드를 습관적으로 그리고 다양하게 모으다 보면, 매일 무슨 키보드를 사용할지 정하는 고민에 빠지곤 합니다. 매번 사용하고 싶은 키보드를 꺼내 쓰는 즐거움도 1~2년이라서... 몇 달간 컴퓨터에 연결된 키보드를 그냥 쓰거나, 매시간 다른 키보드를 사용하거나 펼쳐두고 고민하는 상황도 빈번히 벌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장기간 어디로 갈 때는 선택하는 키보드가 의외로 쉬웠던 기억이 납니다. 멀리 여행을 가면 작고 가벼운 물건들로 챙기기 마련이지만, 언제든지 탈없이 작동해야 한다는 신뢰성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 여행


2010년경 해피해킹프로2와 해외로 떠났던 시기

2004년 당시에는 첫 기계식 키보드로 최대 5,000만 번의 내구성을 가졌다고 알려진, 체리 MX스위치를 가진 키보드가 제일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디로 멀리 떠나게 될 시점에는 막상 가지고 가게 되지는 않더군요. 표준 레이아웃은 가방에 넣기에는 비교적 큰 사이즈고 텐키리스조차도 휴대할 때는 걸림돌이 되곤 했습니다. 게다가 나중에는 Fn 단축키가 편해질 만큼 익숙해진 시점이라 그런지, 해피해킹을 메인 키보드로 사용해도 불편함을 못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2004년~2010년간 6년 정도 사용하던 체리 MX계열 스위치에서 왠지 미묘한 채터링(chattering)을 느끼던 시점이라, 접점 문제가 사실상 없었던 해피해킹프로 같은 토프레 정전용량 무접점을 조금 더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금속 접점을 사용하는 기계식 키보드에서 한계점을 느꼈던 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제가 알기로 과거 토프레 정전용량 키보드는 최소 내구성을 3천만 번을 보증한다고 알고 있지만, 과연 제가 살면서 리얼포스를 얼마나 눌렀을지 조금은 궁금해집니다.




| 내구성


체리 MX스위치의 그래프 (Force graph) - https://www.cherry.de/de-de/gaming/developer
저온에서 테스트되고 있는 체리 MX스위치 - https://www.youtube.com/watch?v=Pu1gP4PfqCQ

요즘 키보드 제조사들은 스위치 내구성 부분을 예전처럼 많이 언급하지 않지만, 최소 보증 내구성과 최대 사용 내구성은 키보드의 성향이 달라질 만큼 상당히 큰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2015년쯤 체리 MX스위치보다 저렴하게 판매되던 카일, 게이트론, 오테뮤 스위치는 자신들도 체리처럼 5,000만 번의 내구성을 갖고 있다며 홍보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내구성은 그에 한참 미치치 못했고, 중국의 유사스위치를 많이 사용하던 국내 유통사들에서 내구성과 접점 문제가 크게 터지자 2017년에는 카일에서 스위치를 제조하는 엔지니어가 직접 한국에 방문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스위치 내구성에 대해서 대화할 기회를 가질 수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카일 스위치도 최대 5,000만 회의 내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최소 내구성을 언급하는 질문에는 자신들이 확인했던 최소 작동 횟수는 수백만 번 이하라는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중국 제조사 3곳 중에서 그나마 낫다고 평가되던 카일이 그 정도였으니... 그때의 게이트론과 오테뮤의 내구성은 더 처참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후 카일은 금속 접점의 한계성을 인정한 것인지, 적외선센서 방식의 광축을 통해서 내구성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됩니다. 물론 현재 나오는 체리 MX스위치는 그때보다 2배가 넘는 1억 회 이상을 보장합니다.




| 휴대성


2004~2005년 당시에 휴대하던 소지품과 체리 ML4400 키보드, 윈도XP 태블릿PC 에디션 기동화면

키보드의 전체적인 감각을 나타내는 키감, 요즘 말로는 타건감(打鍵感)을 알게 된 이후에는 단순히 노트북만 가지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휴대하는 노트북 이외에도 사용하는 키보드를 따로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생소하던 태블릿 노트북을 주로 사용했었는데, 마우스 대용으로 스타일러스펜을 잠깐 사용하는 거라면 괜찮았지만 마우스 커서를 오랜 시간 조작하는 것은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추가로 마우스와 마우스패드를 따로 휴대하는 것은 번거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해결한 방법은 트랙볼을 내장한 작은 기계식 키보드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체리에서 델 서버용으로 납품되었던 ML4400이 당시에 사용하던 노트북과 상당히 잘 어울렸다고 생각합니다.




| 조합성


현재도 자주 쓰는 1987년산 모델엠 스페이스 세이버와 86키 버전의 영문판 리얼포스

그렇게 20년 전에는 키보드를 딱 두 개만 남긴다면,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주로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그렇다고 2개만 쓸 것도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모델엠과 리얼포스라고 언급하곤 합니다. 이유는 이 두 가지의 키보드는 인식률과 내구성이 기계식보다 좋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나는 버클링방식의 클릭 키보드, 다른 하나는 무접점의 정전용량이라는 서로 상반된 존재이기 때문에 번갈아가면서 사용하기에 재미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분식점에서 먹던 떡볶이와 순대 같은 조합이 아니었을까요? 다르게 보면 함께 사용하면 맛 좋은 단짠 조합에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추가로 PBT키캡이라는 공통된 특성 때문에 오래 사용해도 표면에 번들거림이 적었고, ABS에 비해서 변색이 별로 없던 점이 특징입니다. 요즘은 변색이 진행되면 과산화수소를 통한 탈색이 보편화되었지만, 산화제라는 특성상 사용하면 플라스틱이 삭는 문제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의 분위기는 저가 키보드에 대량으로 들어가는 ABS수지 키캡이 많았는데, 이 키캡들의 특징이 왠지 싸구려틱한 타건감을 갖고 있었던지라 ABS라고 한다면 변색 때문에 모두가 기피하시던 시점과 맞물려서 대부분 PBT키캡을 선호하던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요즘에 선호하는 ABS+PC혼합물의 시원한 키캡 소리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알루미늄


2000~2001년에 발매된 FILCO의 알루미늄 키보드 (FKB-65EU-MM, FKB-102U-MMII)

당시에는 또뀨같은 커스텀용 하우징이 생기기 전이라, 금속 외장 키보드를 사용하려면 제조사에서 만든 한정판이나 스페셜 모델을 구입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알루 키보드를 쓰려고 했던 이유는 체리 MX3000 같은 키보드에 공제 보강판을 넣은 후 중량감에서 느껴지는 고유한 느낌을 좋아했었기 때문입니다. 무보강 키보드에 보강판을 넣으면 바닥이 탄탄해지는 타건감도 생기지만, 넓은 면적과 무게에서 생기는 특유의 중량감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체리 갈색축, 스틸 보강판, 알루미늄 외장을 즐겨 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요즘에 다시 쳐보면 키보드보다는 그냥 알루미늄 판재와 같은 느낌입니다.




| 커스텀


또각또각님 보강판을 이식했던 MX1800 Ferrous GT와 옛날의 책상샷... 당시에는 이렇게 생활했습니다.

모임에서 테스트용으로 보여주신 또뀨 프로토타입을 만지면서 의외로 끌리지는 않았습니다.

제 기억에는 당시에 선호하던 갈색축과 조합이 안 어울렸던 기억이 납니다. 게다가 제가 'ㄱ'엔터(ISO나 JIS엔터)를 많이 선호하던 편이라, ANSI와 ASCII 스타일의 배열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텐키리스 키보드가 스페이스 세이버를 쓰거나 텐키를 자르지 않으면 거의 존재하질 않아서, 숫자패드를 자른 마제스터치에 겹쳐봤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또뀨가 ESC부터 F12의 공간을 보면 F열의 레이아웃이 묘하게 MX1800에 닮으면서 MX3000의 텐키리스에 가까운 무언가가 아니었나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또뀨를 삼천 세이버라고 불렀던 거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체리 키보드는 오리지널 기판 보다 뀨뀨님의 단단한 기판을 조금 더 좋아합니다. 이렇게 옛날에 사용하던 키보드를 보면, 카이저 시리즈 같은 과거에 개조된 키보드가 생각나곤 합니다.



제 전용으로 만들어진 EQHA:RE(2011)와 EQL3F(2015)

그렇게 ㄱ엔터가 없는 시간을 잠깐 보내다가, 2006년쯤 금융권에서 사용하던 LG로고의 체리 MX8000 폐기품이 옥션에 엄청 풀렸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갈색축은 체리 특정 모델의 키보드(5000,1800,11800,8113,8200)나 일본에서 판매되던 일부 키보드에서만 보던 스위치였지만, 주옥선 사태 이후로 갈색축이 매우 흔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백색축은 이베이에서 거래되던 체리 키보드, 흑색축은 와이즈 같은 터미널 키보드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청색축은 키보드 전문 쇼핑몰에서 새거 3000이나 타입나우를 항시 판매 중이었기 때문에... 갈색축이 선택지가 조금은 적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개인 제작 키보드가 활성화된 시점과 맞물려서, ISO엔터로 전용 키보드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키랩 활동 시기에 구했던 아크릴 기반의 A.87과 MX1800 L3
LZ×ASRH(2018)와 TX87(2016)

키매냐 시절이 빈티지 수집, 기성품 구입, 공동 제작과 공동 구매, 그리고 개조와 자작 키보드 느낌이었다면... 키랩 시절은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던 모두가 공제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매번 새로운 공제품이 있었고, 핫스왑 기판이 대중화되기 이전이라 매일 스위치 납땜과 윤활 이야기가 풍성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스웨그키나 지온웍스 같은 전문적인 부품 판매점이 적었던 탓에, 대부분의 분들이 기존 키보드를 분해하고 커스텀 부품으로 많이 활용하던 그런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대륙산 승화 키캡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공동 구매와 공동 제작해서 판매하던 분들이 부업으로 따로 키보드 관련 쇼핑몰을 많이 만들던 시기였습니다. 이쯤부터 PC매니아층이 많은 쿨엔조이나 디카 커뮤니티였던 디시인사이드 같은 대중적인 공간에서도 키보드 이야기가 부쩍 늘어났습니다.




| 그리고 다시 키보드...


F1-8X V2 (2025), Transition Lite (2024)
Wooting 80HE (2024), QSENN SEM-DT35 89 (2024)

사람 모이는 곳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장터 되팔렘나 사람들의 친목질... 그런 것에 많이 지쳐서 한동안 키보드를 혼자 했습니다. 커뮤니티로 복귀한 곳은 2023년에 키보드 박람회 글을 보다가 발견한 카페였습니다. 활동을 하다 보니 요즘 키보드를 다시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작년에 트랜지션 라이트를 조립하고, 올해는 F1-8X V2까지 조립하면서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단순히 1대를 결정하지 못하고, 수집하기로 마음먹으니 21년 전보다 구입과 결정은 쉬워졌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기성품도 좋아하기 때문에, 작년에 구입한 우팅 키보드나 DT35도 참 잘 쓰고 있습니다. 지금은 키보드를 주변기기나 개인 도구로 보지 못하고 자료로 취급해서, 1대만 고를 수도 없고 1대만 사용할 수 없는 그런 몸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중간에 건너뛴 내용도 많지만, 과거 이야기를 언급하다 보니 글이 길어져서 많이 생략했습니다. 글을 오래 진행하다 보니 자전적인 글이 되어버렸네요.


소유하고 있는 다른 키보드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음 기회에 풀어보고 싶습니다.







본문에서 소개되지 못한 다양한 키보드에 대해서 궁금하신가요?

전부는 아니지만, 여기서도 키보드 목록을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brunch.co.kr/@ruseupi/107


가장 최근에 조립한 F1-8X V2에 대한 글을 남겨봅니다.

키보드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 https://brunch.co.kr/@ruseupi/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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