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왕고래 Aug 30. 2021

매일 해골물을 마시고 산다.

당신의 해골물은 어떤 맛인가요?



오랜만에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무려 6시에 출근길에 오른 것이다. 사무실에 도착 후 형광등을 다 켰다. 그리곤 곧바로 탕비실로 향했다. 단 하루 일찍 출근한 주제에, 마치 내가 '아침형 인간'이라도 된 양 모종의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런 보람찬 마음으로 커피머신 전원도 눌렀다. 아직 가시지 않은 더위에, 냉장고에서 얼음을 잔뜩 꺼내 머신 앞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그때.


컵을 쥔 손을 커피머신 쪽으로 옮기다가 옆에 놓인 바구니를 툭 치고 말았다. 바구니는 한참을 요동치다 바닥으로 떨어졌고, 손에서 미끄러진 컵에서 얼음이 주르륵 떨어졌다. 전부 땅바닥으로 향하기 전 손으로 급하게 몇 개를 낚아챘다. 그리고 얼른 다시 컵에 집어넣었다. 나머지는 미처 잡지 못해서 땅바닥으로 직행했다. 결국 냉장고로 돌아가 부족한 얼음을 다시 채워 넣은 뒤에야, 그 위로 커피를 내려 덮을 수 있었다.


사무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커피를 음미하는데 기분이 째진다. 오늘 하루 기분이 정말 좋을 것 같다. 한 모금 한 모금 음미를 하는 사이 직원들이 속속 도착했고 파이팅 넘치는 인사도 나눴다. 오전 회의에 들어갔다가 나오니 얼음은 꽤 많이 녹아있었다. 남은 커피와 얼마 남지 않은 얼음들을 입안에 털어 넣고 잘근잘근 시원하게 씹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


"얼음이 왜 이렇게 말랑말랑해?"


도로 컵에 뱉어보니 지우개 조각들이 쏟아져 나온다. 일부 조각들을 보니 새것도 아니다. 복사기와 팩스 등이 함께 놓여있는 우리 탕비실에는 문구류 역시 많았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직원들이 돌아가며 사용하는 지우개가 분명하다. 그것들이 아까 전 바구니에서 쏟아져, 얼음과 함께 컵으로 뒤엉켜 들어왔다. 나는 떨어지던 그것들을 낚아채 컵에 그대로 직행시킨 것이다. 뱉고 나서야 알았다.


순간 사무실 사람들 얼굴이 줄줄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유독 손에 땀이 많은데도 굳이 연필을 고수하시는 최 과장님, 포스트잇에 낙서하기를 좋아하던 김대리…. 그뿐인가.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온 지우개의 크기들, 거기에 묻어있는 뒤엉킨 때와 연필 자국들까지!


다 뱉고 보니 컵 안이 아주 가관이다.

이것들을 '아침형 인간이 누리는 선물'이라며, 아주 그냥, 기분을 한껏 내며, 참 맛있게도 마셨다.


옛날이야기 속 원효대사처럼 구역질이 나오진 않았지만, 나 역시 분명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메스꺼운 기분을 느끼며 우두커니 찻잔을 바라보는데 헛웃음까지 나온다.


참나. 이게 무슨 일이람.



어쩌면 무해할 수도 있는 해골물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나쁜 해골물'만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한참 '지우개 해골물'을 소화시키고 난 뒤 주말 즈음이었나. 가족들과의 식사에서 난 '꽤 무해한 듯 보이는 해골물'도 봤다.


우리 아버지는 유난히 할머니의 반찬을 좋아하신다. 어머니가 하신 요리는 물론, 다른 음식도 전혀 가리지 않고 잘 드시긴 한다. 얼마 전 동생의 예비 신부가 음식을 만들어와도 맛있다며 잘 잡수시는 아버지였다. 다만, 고향에서 할머니가 무어라도 보내온 날이면 입이 마르고 닳도록 그 맛을 칭찬하기 바쁘다. 하루 종일 입이 귀에 걸려서 삼시세끼 그 반찬에만 손이 간다. 그저 밭에서 농사지은 날 것의 야채 그대로를 보내와도, '고향에서 온 것은 질이 다르다'고 하신다.


하루는 장난기 심한 어머니와 내가 모종의 몰래카메라를 기획해봤다. 당시 아버지는 산에 가 계셨는데, 어머니는 오전부터 여러 밑반찬을 만드느라 분주하셨다. 이따 아버지가 도착하시면 어머니의 음식을 할머니가 보낸 거라고 말해보자는 것이었다. '킥-킥-' 거리면서 아버지가 오실 때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도래한 저녁 시간!


어머니는 그간 잘 사용하지 않던 양념으로 버무린 여러 밑반찬을 차려놓았다. 아버지는 곧장 하나하나 맛보시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마침내 회심의 한 마디를 던지신다.


"이거 어머님이 보내셨더라고. 맛이 어때?"


그러자 아버지의 반응은 놀라웠다. "그~~ 래~!?"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쩐지~~ 진짜 맛있더라!"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칭찬은 결코 끝이 나지 않았다. "역시 고향에서 나온 깻잎이 크기나 식감도 다르다니까! 안 그래?" 등 밑반찬 하나하나가 가히 '칭송'이라 할만한 평가들을 받았다. 새롭게 도전한 어머니의 요리는 그렇게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아버지 역시 맛있게 그릇을 비우셨다. 어머니와 내가 약간의 눈짓을 주고받으며 웃어대는 사이에도 아버지의 밥그릇은 리필, 또 리필이었다.


우리의 소소한 장난은 아버지가 세 그릇을 비우고 난 뒤에야 밝혀졌다. 그런데 이게 왠일일까. 이실직고를 하는 우리에게 아버지는 되려 "에이~ 거짓말하지 마! 이거 완전 고향 밭에서 따온 거 그대로던데 뭘!" 하시는 게 아닌가! 미처 결론 내려지지 않은 '밑반찬의 비밀'은, 그렇게 유야무야 아무렇지 않게 덮어졌다.




불현듯 돌이켜보니 왠지 삶이 이렇게 흘러가는 느낌이다.

두 눈 치켜뜨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본의 아니게 해골물을 마시며 살게 되는 것 같다.

원효대사 역시, 잠결에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마신 그 해골물에 대단한 시원함을 느끼지 않았나.


어쩌면 나는 매일같이 이것저것, 좋은 것, 나쁜 것, 해골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살고 있는건 아닐까.

한껏 눈에 힘을 주고 주변을 살펴본다 한들, 내가 수많은 해골물을 하나하나 분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자신도 없고.

시야를 가리는 암흑은 매일같이 우리를 찾아오니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해골물'을 매일같이 마시고 있으려나. 



매거진의 이전글 '죄업'의 분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