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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왕고래 Sep 24. 2021

아이들 걸음걸이를 보면 미래가 보인다.

불현듯 스치는 상황에 개똥 같은 해몽 더하기



나 홀로 미팅을 마치고 시계를 봤다.


다음 일정까지 제법 시간이 남아있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걸 하기는 참 애매한 시간. 살짝 고민하다가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들고 나왔다. 탄천변 공원 벤치에 앉아 한입 베어 물었다. 가을이 성큼 다가와서일까. 하늘도 높고 날씨가 퍽 좋다. 강가 주변으로 놀러 나온 어린이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날름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이 징검다리의 아이들을 쭉 지켜보게 됐다.


사무실 앞 탄천은 아주 얕은 강가다. 성인 기준에 깊이가 종아리 정도 된다. 그래도 며칠 전 내린 가을비 때문이었을까. 물이 징검다리에 아슬아슬 넘칠 듯 흐르고 있었다. 마치 거품 가득한 맥주잔처럼 찰랑찰랑한 물줄기. 그 사이 놓인 징검다리로 아이들이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만히 저 아이들의 걸음걸이를 지켜보자니, 별안간 녀석들의 성격까지 확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


첫 번째 아이는 겁 없는 '도전자'였다. 징검다리에 다다르는 순간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제법 간격이 넓은 그 돌다리를 성큼성큼 높이도 뛰었다. 녀석은 발아래의 물줄기를 단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오로지 건너편 도착점만 바라보며 출발도, 진행도 무척 빠른 모습.


"얘들아! 빨리 와! 뭐하냐!"


뒤를 돌아보며 소리치다가 비틀거리던 그 녀석이 이내 크게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쪽 발이 미끄덩 물가로 빠졌다. 나도 깜짝 놀라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 그 아이는 잽싸게 발을 빼며 중심을 잡았다. 그러더니 "오! 나 지금 완전 빠질 뻔했어!"라 외치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이내 또다시 펄쩍펄쩍 뛰며 건너편까지 도착한 선두주자. 한참 빠르게 뛰어간 까닭에, 나머지 친구들은 아직 출발조차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는 중이었다.


녀석은 종착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그리곤 빠졌던 한 발의 신발을 벗었다. 이내 양말을 쥐어짜며 건너편 친구들에게 빨리 오라 소리친다.


2.


2번 주자는 초반에 조금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징검다리라고 해봐야 성인들에게는 그저 반보 폭밖에 되지 않는 정도. 그러나 이들에게는 아마도 굉장한 임무이자 미션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찰랑이는 물줄기가 겁이 났는지 나무 막대를 주워 찔러보고, 돌멩이도 던져보는 두 번째 주자가 눈에 들어왔다.


녀석이 결심을 굳힌 건 찰나였다. 앞서간 선두가 한 발을 물에 빠뜨리던 순간, 그에게 갑자기 용기가 솟구쳤다. 미끄러진 1번 주자를 보곤 "야! 괜찮아!?"라 외치며, 두 번째 선수는 자신도 모르게 징검다리로 도약하고 있었다. 이윽고 선두 못지않은 스피드를 내며 2번 주자 역시 종착지에 다다랐다. 녀석 역시 조금은 젖어있었다. 급하게 뛰어간 탓에 살짝 돌 위로 흐르던 물이 출렁이며  바지로 튀었다.


"야! 너 괜찮냐? 뭐야! 나도 젖었네!"


바지 밑쪽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두 녀석이 이내 철봉에 매달리며 마지막 주자를 향해 소리쳤다. 얼른 안 오고 뭐하냐는 목소리가 강 건너로 크게 울려 퍼진다. 시끄러운 두 친구와 달리 3번 선수의 모습은 매우 고요했다.


3.


마지막 주자는 딱 보아도 조심성이 많아 보였다. 녀석은 다른 아이들이 먼저 출발하고 있는 동안 차분히 가방을 벗었다. 가장 먼저 달려 나갔던 선구자가 한쪽 발에 타격을 입은 모습을 봐서였을까? 아이는 신발과 양말을 차례로 벗더니, 양말은 가방에, 신발은 두 손에 들었다. 최대한 끈을 조인 가방까지 단단히 붙들어 매고서야 녀석은 출발 준비를 마쳤다.


저만치 먼저 도착한 아이들은 건너편에 있던 놀이터 기구에 매달려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 1등 주자는 철봉에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려서 마지막 주자를 향해 다시 한번 소리쳤다.


"야!!! 얼른 좀 와!"


앞선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을까. 녀석은 오직 자신의 발과 징검다리가 있는 바닥만 바라보며 조심스레 출발했다. 행여 미끄러질까 차분하게 내딛는 발걸음은, 찰랑이던 물줄기도 가볍게 스치듯 흘려보냈다. 마지막 주자의 걸음걸음은 참 차분하고 우아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 친구가 한 곳에 다시 모였다.




건너편 목적지에 모두 도착한 녀석들의 모습은 출발지에서처럼 제각각이었다.


한참 유희(?)를 즐기다가 늘어지게 벤치에 누워있는 선두주자의 모습을 보니 코웃음이 났다. 아직 놀이기구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두 번째 녀석은 여전히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마지막 주자는 가방에서 양말을 꺼내신고 이내 뒤를 돌아보며 뿌듯한 표정을 짓는다.


왜인지 작금의 내 친구들과 동료들이 떠오른다.


진작 다 먹어버린 아이스크림의 나무 스틱을 질겅질겅 씹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다음 스케줄까지 비어 있던 이 애매한 시간이, 징검다리 소년들 덕분에 아주 즐겁게 메꿔졌다. 나는 과거에 저 징검다리를 어떻게 건넜던가? 그리고 요즘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하며 돌다리를 건너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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