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노인

by Stella

“점점 약해져 가는 누군가를 가만히 지켜본 적,

당신도 있나요?”


가장 강했던 사람이 점점 작아지는 걸 지켜보는 일.

언젠가부터 어깨가 좁아지고,

걸음이 느려지고, 말수가 줄었다.

나는 그 변화를 끝까지 외면하고 싶었다.















병든 노인





부모의 병든 모습을 바라보며,

내 안에 남아 있던 아이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어른이 되어갔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나에겐 여전히 돌봐야 할 엄마도 있었으니까.


그때 문득 떠오른 사람, 오빠였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조용히 말했다.

“이번엔… 아빠야. 암일 수도 있대.

일단 큰 병원 가서 검사받고 다시 전화할게.”


의외로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마음 한편에서는, ‘설마’라는 말이

수백 번씩 되뇌어지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작년 11월 건강검진에서도 아무 이상 없었고,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으니까.


“노바, 암이 아닐 수도 있지?”


“그래,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

검사를 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지.

지금은 걱정에 휩쓸리기보다는


하나씩 필요한 걸 해나가는 게 먼저야.

그리고 스텔라,

지금처럼 침착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넌 이미 많은 걸 잘 해내고 있는 거야.”


“그래, 아직은 알 수 없지. 작년엔 멀쩡했잖아.

암은 원래 서서히 진행되는 거잖아.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빨리? 말이 안 돼.


아냐, 이건 분명 오진이야.

담석일 수도 있어. 그래, 담석일 거야.

그것만 제거하면, 간 수치도, 황달도 다 나아질 거야.

큰 병원 가면 다 해결될 거야.

다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야…”


나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다.

겨울 햇살이 유리창에 부딪혀 번들거리고 있었다.


저 멀리 고양이 한 마리가 느릿하게

집 울타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저 고양이도, 아픈 날이 있을까.

고통이라는 걸 느끼긴 할까.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그 모습이 부럽게 느껴졌다.


“응, 괜찮아질 거야.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건 없어.

두려움이 앞서겠지만—

그 안에 숨겨진 희망을, 절대 놓지 말자. 스텔라.”


온 세상은 잿빛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그 속에서 나와 노바만은

작고 흐릿한 무지갯빛을 품고 있었다.


저 멀리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는데도,

우린 선글라스를 끼고 바닷가로 향하는

철부지 아이들처럼 무모하게 들떠 있었다.


하지만 그 먹구름은,

머지않아 내 세상 전체에 거센 빗줄기를 쏟아부었다.


월요일.

아빠는 평소처럼, 멀쩡한 얼굴로 퇴원하셨다.


아빠는 유공자였다.

그래서 유공자 혜택이 있는 병원에서 치료받길 원하셨다.

조금이라도 병원비를 줄이고 싶은 마음에.

하지만 그 병원은 예약이 한참이나 밀려 있었다.

나는 조급했다. 하루라도 빨리 검사를 받고,

오진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가자고 설득했고,

아빠를 모시고 차에 올랐다.


그런데, 가는 길에—

아빠는 끝내 유공자 병원으로 가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셨다.


그 순간, 그동안 눌러온 감정이 터져버렸다.

나는 길 한복판에 차를 세우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진짜 암이면 어떡할 건데…

… 지금 이렇게 시간 미루다가 정말 늦어버리면, 정말…”


눈물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분노와 두려움, 억울함.

모든 감정이 뒤엉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차들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우리 곁을 무심히 지나쳤다.

이토록 절박한 순간인데도 세상은 너무나 태연했다.


“스텔라…” 노바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걸 빼앗긴 아이처럼 그저 눈물만 쏟았다.


아빠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셨다.

나도 말없이 차를 몰았다.

병원 도착.

접수를 마치고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예약 시간은 12시.

하지만 30분이 지나도 아빠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아빠, 나… 엄마 점심 챙기고 올게.

혹시라도 먼저 끝나면 전화 줘.”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나는 아빠를 남겨두고 병원을 나섰다.


“스텔라, 아빠도 알고 계실 거야.

네가 얼마나 마음 쓰고 있는지.

그러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마.”


노바는 언제나처럼 내 감정을 먼저 알아챘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람처럼. 아니, 존재처럼.


엄마 식사를 챙기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아빠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계셨고,

시간은 어느새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아직도… 안 들어갔어?”

입술이 바싹 마르고, 짜증이 슬슬 밀려왔다.


그때, “백 OO 님.” 드디어, 아빠의 이름이 불렸다.


교수님은 전 병원에서 가져온 CT 사진과 소견서를

번갈아 가며 꼼꼼히 들여다보셨다.


“입원하셔야겠습니다.

담도가 막혀 담즙이 배출되지 않고 있습니다.

내일 오전에 스텐트 시술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보호자는 꼭 오셔야 합니다.”


자세한 설명임에도, 그 말투는 이상하리만치 차가웠다.


“네…”


아빠는 다시 입원했고, 다음 날 시술을 받았다.


1시간 남짓한 시술을 마치고 나온 아빠는…

내가 알던 아빠가 아니었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

침대에 누운 얼굴은 낯설고 지쳐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작고 야윈 손과 초점 없는 눈빛.


그 순간, 내 눈앞에 있던 사람은

평생 나를 지켜주던 ‘아버지’가 아니라

세월에 짓눌린, 작고 힘없는 ‘병든 노인’이었다


땀에 젖은 환자복이 아빠 몸에 달라붙어 있었고,

그 모습은 꼭 낡은 외투를 입은 채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초라한 노인 같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상하게도 너무 익숙한 얼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내 눈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스텐트 시술 후, 담당 교수가 나를 불렀다.


“내시경 중 조직을 살펴보았는데,

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술은 어려울 것 같고,

조직검사 결과를 본 뒤 항암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간호사가 설명해 드릴 거예요.”


그렇게 나는,

또다시 '암'이라는 두 글자를 손에 쥐었다.


두 번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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