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백하러 가는 날

by 뚜벅초

어느새 레아와 비노는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항상 함께하는 사이가 됐다.

같이 숲속마을 오솔길을 걷기도 하고, 곰철의 카페에서 새로 나온 메뉴를 하나씩 시켜서 맛보고, 도서관에서 책이나 영화를 보고, 부들이 아저씨의 찹쌀떡 가게에서 팥소가 잔뜩 든 떡을 하나 사서 반씩 나눠 먹으며 코에 묻은 가루를 보고 푸하하 웃기도 했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이렇게 생각했다.

'이대로도 좋지만, 뭔가 더 제대로 내 마음을 얘기해야 할 것 같아...'

'이대로도 좋지만, 비노(레아)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는 그냥 친구일까, 아니면...?'


그러는 사이 숲속마을의 앙상하던 나뭇가지에는 뾰족뾰족 조금씩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하고, 알록달록 예쁜 꽃들이 나뭇가지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바람에도 서늘함 대신 따뜻함이 후욱 불어오는 계절이다.

특별할 것 없어도 왠지 새로운 마음을 먹게 되는 그런 날이다.


오늘도 비노와 레아는 곰철의 숲속 카페에서 딸기 케익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카페 안에는 조용한 피아노곡만이 울려퍼지고 곰철이 언제나처럼 큰 헝겊으로 그릇들을 닦고 있다.....레아와 비노 사이의 묘한 기류에 신경을 쓰면서.


"저기, 레아, 있잖아..우리..."

"...응?"


그때, 갑자기 카페 창 밖으로 들려오는 굉음.

"쾅!!!!"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곰철이 닦던 컵을 내려놓고 창 밖을 내다본다.

그때 카페 문이 확 열리고, 코끼리 아주머니가 뛰어 들어오며 외친다. "큰일 났어요! 마을버스 타이어가 갑자기 터지며 사고가 났나봐요. 누가 좀 도와주실 분 없나요?"


"잠시만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비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방에 남은 타이어랑 장비가 있을 거에요. 바로 다녀와서 고칠게요. 레아, 미안. 난 잠시 다녀올게."

"괜찮아 비노! 나도 같이 가서 혹시 마을사무소에서 도울 게 없는지 알아볼게."

"아유, 정말 고마워요..." 코끼리 아줌마가 양 앞발을 꼭 잡으며 말했다.


구슬땀을 흘리며 타이어를 수리하고 있는 비노의 모습을 보며 레아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비노 너, 역시 듬직하다니깐...'




마을버스 사건으로 비노의 고백이 미뤄지고 나서 또 며칠이 흘렀다.

산에 피어있던 봉우리들은 어느새 예쁘게 피어 꽃밭을 이루고 있고 바람도 더 따스해졌다.


그날도 비노와 레아는 퇴근길을 함께 걸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숲속마을 길의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고, 골목골목에선 맛있는 저녁 냄새가 새어 나기도 했다.


비노는 톱밥이 어깨에 내려앉은 작업복을 걸친 채 레아의 옆에서 걷고 있다.

비노가 하늘을 올려다보다 말했다.

"이 길, 그러고보니 우리 어릴 때도 자주 걸었던 길이네."

"언제?" 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중학교 때, 너 그때 스타캣츠 노래 맨날 들으면서 걸어 다녔잖아. 언젠가 오빠들 만나러 도시 간다면서." 버드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때도 목공 한다고 털에 잔뜩 톱밥 묻히고 다녔고."

레아가 민망한 듯 귀끝이 빨개져서 말한다. "악, 스타캣츠라니. 그걸 아직도 기억해? 나 진짜 그 때 아이돌에 푹 빠져서 맨날 도시 간다고 할머니 몰래 용돈 모으고 난리였는데."

"나도 그땐 목공에 빠져서 다른 건 관심도 없었던 것 같아. 그래도 우리 그때 되게 재밌지 않았어?"

"맞아. 그땐 우리 서로 각자의 관심사에 빠져서 같은 길을 걷는지도 몰랐네."

"그러게. 후후. 우리가 이렇게 같이 이 길을 또 걷게 될 줄은 몰랐어."

"응. 그리고 지금은..같은 길인데도 뭔가 다르게 느껴지네."

"지금 이 길이 더..따뜻하게 느껴져."


비노가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은 꼭 말하고 말거야...이번에도 말 못하면 계속 이렇게 친구로만 지낼 것 같아.'

"레아, 저, 있잖아..우리..."

"응?"



갑자기 버드의 등 뒤에서 킥보드 다섯 대가 달려오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어! 비노 형아랑 레아 누나다!"

"형아랑 누나 여기서 뭐 해요? 킥킥"

아, 버미랑 그 친구들, 숲속유치원 꼬마 녀석들이다.


"어..어? 얘들아, 안녕?" 비노와 레아는 눈이 동그래져서 당황함을 숨기질 못한다.

"있잖아요,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요, 비노 형아랑 레아 누나랑 맨날 데이트한대요. 히히" 버미가 놀린다.

"데이트? 데이트가 뭐야?" 준이가 묻는다.

"데이트는 있잖아 남자친구랑 여자친구랑 서로 사귀는 거야~" 제이가 아는척을 한다.

"언니랑 오빠도 데이트 하는거에요? 고백? 히히히" 가만히 있던 미미까지 거든다.

"누나 형아, 데이트 잘 해요!" 다섯 꼬마들이 휘잉 킥보드를 타고 가버린 길에는 적막만이 남았다.


비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아, 또 망했네...'


그러자 레아가, 한숨을 푹 쉬더니 입을 열었다.

"에휴...비노!"

레아가 빤히 비노를 바라본다.

"응? 레아...?"


"지난번 카페에서도 우물쭈물 넘어가더니 또 이럴 거야?"

"뭐...뭐를?"


"나한테 할 말 있었잖아"

"으..으응?"

"고백."


레아가 잠시 옆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비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내가 할게, 우리..이제 친구하지 말고, 사귀자."


"레...레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비노의 얼굴 위로,

마치 물에 물감이 퍼지듯 서서히 함박웃음이 퍼지기 시작한다.


"정말 답답해서 말이지, 언제까지 눈치만 보고 못 할거야? 이렇게 먼저 말하게 하고 말이야!"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미 웃음을 숨기지 못하는 레아.

".....좋아, 레아. 나도 레아를, 정말 좋아해."


둘은 마주보며 조심스레 서로의 손을 잡는다.

어느새 초승달이 나무 위로 떠올라 둘의 머리 위에 따뜻한 달빛을 내리고 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7화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