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다

by 뚜벅초

"아니, 그러니까 지금 며칠 째냐고요! 나 원 참, 빨리 좀 해줄 수 없어요?"


늘 평화롭던 마을사무소가 오늘따라 시끄럽다.

목소리는 바로 최근 도시에서 온 두더지 아저씨. 할머니와 둘이 지내던 두더지 꼬마 두두의 아빠다.

그 앞엔 민원 담당 직원 레아가 어쩔 줄 몰라하며 머뭇거리고 있다.

"저... 도시에서 서류가 오는 데만 시간이 꽤 걸려서..."

하필, 오늘따라 펜네 소장님은 휴가고, 거북 아저씨와 아빠너구리, 페더 씨도 외근 중이다. 아아, 그런데 이 타이밍에 이런 진상 손님이라니!

두더지 아저씨는 아예 책상을 손으로 탕탕 치면서 위협을 한다.

"도시에선 이 정도는 하루 만에 다 됐다고요. 지금 일주일이나 기다렸는데 어째서 아직 감감무소식이죠?"

"아..죄송...해요...." 레아는 거의 울음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이다.


그 때였다. 갑자기 마을사무소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린다.


"두더지 씨, 숲속마을에 오셨으면 마을 규칙을 따르셔야죠!"

비노였다. 망치에 스패너까지 멘 채 큰 소리를 내니, 비노답지 않게 제법 그 모습이 위풍당당하다.

"비노...?"

"아..아니 당신은 뭐야?"

"마을 사무소 직원을 존중해 주세요!"

비노가 가까이 다가서자, 이때까지 물러날 일 없을 것 같던 두더지 씨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아..나는 그게 급한 사정이 있어서...아..아무튼 나는 이만 가볼게요!"


사본 -ChatGPT Image 2025년 9월 23일 오후 03_59_47.png 사진:챗GPT

"비노...고마워."

비노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아냐 뭘, 레아 네가 좀 곤란한 것 같아서."

"후훗. 여긴 어쩐 일이야?"

"아...그게, 지난번 마을 축제 때 쓸 무대 장치랑... 스미스 씨가 전달해 달라는 것도 있고..."

"아, 그렇구나."

"저...혹시 퇴근은 언제 해?"

"응? 퇴근? 이제 조금 있으면 퇴근 시간이야! 같이 들어갈까?"

비노가 눈에 띌 정도로 입을 쫙 벌리며 웃었다. "응! 좋아!"



두더지 아저씨의 집은 숲속마을에서 가장 낮은 지대에 위치한 작은 흙집이다. 땅을 조금 파 내려간 그 곳에는 흙으로 단단하게 쌓아올린 토굴 여러 개가 있다.


"아빠!"

두더지 아저씨가 집에 도착해 문을 열자마자 두두가 다다닥 발 소리를 내며 달려나온다. 집 안에서는 고소한 밤 냄새가 난다.

"그래, 우리 두두." 두더지 아저씨가 두두의 둥그런 머리를 꼬옥 끌어안으며 말한다.

곧이어 할머니 두더지도 느릿느릿 나온다. "그래, 마을 사무소 일은 잘 처리가 됐다니?"

"...네, 곧 처리가 된다고 하네요. 할머니랑 아이가 기다리고 있으니 신경 써 달라고 부탁했어요."

아저씨는 두두를 안아올리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서류만 처리되면, 이제 우리 두두 유치원 수업할 때 도와 주실 선생님도 오시고, 우리 어머니 온천 가실 때 같이 갈 길잡이 장치도 받을 거에요. 그리고..제가 새로 일을 구할 때까지 얼마간의 생활비도요."

"아이고, 그래. 얼른 받았으면 좋겠구나. 두두 유치원 친구들이 잘 도와주긴 하지만 아이들에게도 미안하고 말이지."




레아와 비노의 퇴근길.

노을이 층층이 내려앉은 하늘 아래로 두 친구가 닿을 듯 말듯한 거리를 유지하며 걸어가고 있다.

"저...비노, 괜찮으면 숲속 카페에서 차 한 잔 하고 갈래? 커피는 내가 살게."

비노는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어서 오세요."

큰 헝겊으로 커피 도구들을 반짝반짝하게 닦고 있던 곰철이 인사한다.

그리고 레아와 비노를 보며 잠시 속으로 생각했다. '지난번에 같이 왔던 녀석보다는 훨씬 잘 어울리는군.'


레아와 비노는 각각 차 한 잔씩을 앞에 두고 조금은 어색하게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비노, 아까는 네가 다른 동물처럼 보였어. 넌 어릴 때부터 뭔가 조용하고, 목공만 좋아하는 아이였는데..아까는 뭐랄까, 든든해 보였어"

든든해 보였다고? 말을 한 레아도 속으로 깜짝 놀랐다.

할머니도 할아버지와 친구로 지내다가, 어느 순간 든든해 보였다고 했던 것 같은데.

비노는 쑥쓰럽게 말한다. "헤헤 뭘, 레아 네가 곤란해하는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두더지 씨 일은 안 됐지만...그래도 레아한테 그렇게 말씀하신 건 너무한 것 같아."

"두더지 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그게, 두더지 씨 가족은 모두 앞이 보이지 않는대. 그래서 두더지 씨가 도시의 안마시술소에서 안마사로 일하면서 두두랑 어머니한테 생활비를 부쳐 드렸는데, 최근 안마시술소가 문을 닫으면서 숲속마을로 돌아오신 거래. 그래서 아무래도 이래저래 어려움이 많으신가봐. 스미스 씨랑 내가 얼마 전에 집을 수리해드리고 왔거든."

"아....그랬구나."

그때, 곰철이 케익 한 조각을 들고 와 레아와 비노 사이에 내려놓았다.

"이건 서비스입니다. 숲속마을 꿀을 바른 스콘이에요. 피곤한 하루를 보낸 날은 달콤한 게 필요하죠."




주말 아침.

마을 사무소에 출근하지 않는 레아는 할머니를 도와 온천 청소에 한창이다.

뜨끈뜨끈한 새 물을 받고 탈의실과 온천의 돌까지 반짝반짝하게 닦았다.

"주말인데 좀 자라니까, 청소는 할미가 한다는 데도 그러니."

"아니에요 할머니, 제가 도와 드려야죠. 빗자루질은 제가 할 게요."

그때였다. 낯익은 미끈한 머리가 온천으로 들어왔다.

두더지 씨였다.

두더지 씨는 온천의 한쪽 구석으로 가서 막 지어진 안마소 부스의 벽을 어루만졌다.

"아..여기에 제 안마소가 생긴다니. 이 은혜를 뭘로 갚아야 할지..." 두더지 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삼색 할머니가 말했다. "안마를 그렇게 잘해서 도시에서도 소문 났었다며. 우리 온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야무지게 안마해 주면 그게 은혜 갚는 것이지 별 거 있나. 우리 마을은 다 이렇게 서로 돕고 사는 것이야."

"감사합니다...아!"

두더지 씨는 바로 그 옆에 있던 레아에게 달려왔다.

"지난번엔 정말 죄송했습니다. 두두가 유치원에서 또 넘어졌다고 하길래 너무 답답해서 그만..."

레아는 미소를 띄며 말한다. "아니에요, 두더지 씨. 저도 그런 사정이 있는 지는 몰랐어요."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는 법이란다, 레아야. 이제 청소는 웬만큼 된 것 같으니 들어가서 좀 쉬자꾸나."




그리고 그 날의 첫 손님은 다름아닌 두두의 할머니였다.

두두 할머니는 나무 지팡이를 짚고 언덕을 올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천으로 다가갔다.

"아이고, 오늘따라 물 냄새가 참 좋~타!"

삼색이 할머니가 맞이한다. "어서 오세요, 어르신. 아침부터 역시 부지런하시네요."

"아이고, 레아 할머니 덕분에 우리 아들이 여기 안마소 차리게 됐다면서요. 참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덕분에 우리 식구가 이제 떨어지지 않고 살 수가 있게 됐어요." 두두 할머니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별 말씀을요. 이웃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지요."

뒤이어 마을의 이장인 버미네 할머니곰, 식료품점 양 아주머니, 그리고 찹쌀떡 가게의 코끼리 부들이 아저씨의 아내 코끼리 아줌마가 속속 온천에 도착한다. 덩치 큰 코끼리 아줌마가 물에 들어가자 첨벙!하고 물이 와르르 온천 밖으로 쏟아져 내린다. "깔깔깔!" "아이구, 자기는 엉덩이가 크니 조심히 좀 들어와! 하하하"

아침부터 명랑한 수다 소리가 온천의 수증기를 타고 하늘에 가득 찬다.


"그 얘기 들었어? 마을사무소 레아랑 목수 비노가 요즘 자주 붙어다니던데?"코끼리 아줌마가 호들갑스럽게 말을 꺼낸다.

"어머어머, 걔네들 엊그제만 해도 꼬맹이들 같았는데 어느새 커서 연애를 한대니? 호호호"양 아주머니가 말한다.

"그래도, 레아가 좀 새침하긴 해도 제법 속정이 깊고 비노도 참 건실한 청년이니 잘 어울리네그려." 버미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저나 삼색 할머니는 레아가 좋아하는 청년이 있는 걸 알고 있으려나?"

"아이구, 레아 키운 할머닌데 그걸 모르겠어? 할머니들은 손주 일이면 다 아는 거야."두두 할머니가 대꾸한다.



때마침 삼색 할머니가 소반에 컵 몇 개를 들고 나타난다. "자자, 바로 어제 담근 식혜에요. 한 잔씩 드세요~"

"어머나, 역시 고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후후."

"삼색 할머니, 요즘 레아한테 뭐 좋은 소식 있지 않아요?" 코끼리 아주머니는 벌써 식혜를 한 입에 다 털어넣었다.

"아이구, 그렇잖아도 요즘 레아가 전에 없이 출근할 때마다 아주 꽃단장을 하고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나가더이다. 나도 그 비버 녀석 뭐 싫지는 않구..."

두두 할머니가 그것 보란 식으로 코를 찡긋거렸다.


"레아 고 녀석이 언제 그렇게 다 커서 데이트도 다 하구. 레아가 딱 네 살 때 우리 집엘 왔어요. 자기 어미 아비가 갈라서고 서로 애를 안 맡겠다고 버텨서 할 수 없이 내가 맡았지. 고 불쌍한 어린것을... 우리 집에 오고 첫 날에는 자기 엄마한테 가겠다고 밥도 안 먹고 사흘을 버티더라고요. 이걸 어찌해야 하나, 하다가 이 어린 것이 잘못되면 나도 같이 가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애를 꼭 끌어안고 그냥 잤어요. 그렇게 푹 자고 나니 갑자기 애가 밥을 찾더라고요. 그렇게 벌써 이십 년을 살았네. 허허."

온천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학교 다닐 땐 속도 꽤 썩였는데. 초등학교 들어가니 못된 것들이 어미 없는 고양이라고 무시하고 놀리질 않나, 애가 그걸 말도 못 하고 끙끙 앓다가 겨우 말을 꺼내서 내가 학교에 가서 고 못된 녀석들 앞에서 하악질 한 번 크게 해 줬더니 다들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더이다. 호호."

"하긴, 삼색 할머니 하악질은 알아줘야지." 코끼리 아줌마가 대꾸했다.

"암, 이건 불곰인 나도 못 이겨" 버미 할머니가 말했다.

"고등학교 땐 갑자기 지 엄마 찾으러 가겠다고 쪽지 하나 남겨놓고 기차를 타고 가더니, 한참 뒤에야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더라고. 알고 보니가 제 엄마가 이미 가정을 꾸려서 애도 낳고 살고 있으니, 다시는 아는 척 하지 말라고 그랬나봐. 아무리 그래도 제 자식인 것을... 그 뒤로는 엄마 찾겠다고 말도 안 해요."


"아유, 그래도 레아가 지금 얼마나 잘 컸어요."

"맞아요. 다 할머니 덕분이죠."

"그죠? 내가 손녀딸 하나는 잘 뒀다니까 호호. 식혜 더 마실거면 말해요."

"저요! 한 잔 더 주세요!" 코끼리 아줌마가 손을 들었다.

"으이그~ 자기는 그만 좀 먹어. 온천 물 다 빠지겠다." 양 아주머니가 핀잔을 줬다.

해가 어느새 중천에 뜨도록 온천에서의 수다와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6화내가 이 비버 녀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