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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Dec 02. 2020

아내의 생일


아이들이 모두 잠들었는데 아내는 소화가 안된다며 거실을 줄 곧 왔다 갔다 합니다.

약 먹고 자라고 무심하게 한마디 하자 섭섭했는지 대꾸가 없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옆으로 와서 뜬금없는 이야기를 건넵니다.


"나 생일 축하해줘."

"뭔 소리야?"

"12시 지났으니까 지금 내 생일이에요. 생일 축하받고 자려고."


사람이 오래 살다 보면 두세 번 미친 짓을 할 때가 있다고 들었는데 아내는 그게 오늘인가 봅니다.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증을 선다던가 다단계 회사에 들어가는 것 보다야 충분히 나은 거니 

이런 건전한 미친 짓은 흔쾌히 받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넋이 나간 표정을 풀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느끼한 중년 아저씨가 낼 수 있는 가장 귀여운 목소리로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생일 축하해. 여보."

"역시 선물은 없군. 잘 자요."


모아놓은 비상금이 부족해 이번 생일에는 이달 말에 따로 선물한다고 미리 일렀습니다.

대신 갖고 싶어 하던 고급 무선 이어폰을 사주기로 했습니다. 

한 세 번은 이렇게 하기로 약속을 했음에도 아내는 약속과 현실 사이에 

어떤 판타지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무튼 아내는 이른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고 시원 섭섭한 마음으로 잠들었습니다.




다음 날 저녁, 다른 세계를 달리고 있는 고3 아들만 빼고 

네 식구는 집 근처  중국음식점으로 향했습니다.

아내는 깐풍기와 탕수육을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좋아하는 탕수육과 본인이 먹고 싶었던 깐풍기로 생일 저녁 식사의 타협점을 찾은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어머니도 본인 생신 때면 나에게 꼭 물어보셨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넌 뭐 먹고 싶니?'


유명하다는 식당인지라 손님은 많았고 음식은 코딱지 만했습니다.

한 끼에 2.5인분은 먹는 둘째 아들 때문에 아내와 나는 0.5인분으로 식사를 마쳤습니다.

가끔 우리는 돼지를 사육하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흡족하게 바라보는 아내 때문에 뭐라 할 수는 없었지만

왜 내 것까지 자기 마음대로 덜어주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진심으로 이런 비겁한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엄마한테 이를까?'




아내는 저녁 식사 시간부터 줄곧 핸드폰을 보고 있습니다.

집에 와서도, 간식을 먹는 시간에도, 무슨 연락이 오는지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평소에는 핸드폰에 빠져있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느라 바빴을 아내가

본인의 생일이라고 일탈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나 봅니다.

혼자 키득키득 웃어가며 손가락은 바삐 자판을 누르느라 정신없습니다.

덕분에 조용한 생일 저녁을 보내고 있다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식구들은 각자 자기 영역에서 각자의 커뮤니티에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별안간 아내는 sns를 잠시 멈추더니 나에게만 들릴 듯 한 소리로 오늘의 기분을 풀었습니다.


"살면서 선물을 제일 많이 받은 것 같아."


무슨 소릴까요?

확인한 바로는 막내딸이 집 근처 마트에서 엄마 몰래 사서 

퇴근하자마자 깜짝 선물한 주름 패치밖에 없었습니다.

고마워하는 아내 옆에서 "네가 생각해도 엄마 주름이 심하긴 하지?"라고 물었다가

한 소리 들었던지라 기억이 선명합니다.




아내는 손을 내밀어 핸드폰에 담긴 선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케이크 몇 개, 커피 몇 잔, 화장품 상품권 등등 제법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선물을 보내준 친구들을 알려주며 묻지도 않은 근황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한동안 바쁜 일상으로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을 제법 키워내고, 혹은 이별하고, 혹은 독립하면서

다시 옛 친구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듯합니다.

아내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20대 초반,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삶은 다르지만 모두 비슷한 마음을 담고 살고 있었나 봅니다.

'그리움' 말입니다.


"sns는 정말 대단한 거 같아. 이렇게 쉽게 연락할 수 있었던 거였어?

영국이랑 미국에서도 연락이 왔다니까. 나 정말 글로벌한 사람인가 봐."


아내의 자랑은 꾸밈이 없었습니다.

세월을 관통하면서 끊어졌던 선들이 아내의 생일을 통해 다시 이어졌습니다.

sns의 놀라운 힘입니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3천 원짜리 볶음밥을 먹으며

분식집 길 건너까지 떠드는 소리가 들리던,

그때 그 시절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습니다.


모두 한 번 모이기로 했답니다.

코로나만 진정되면 어디든 달려갈 기셉니다.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제 한 번 보자' 같은 평범한 인사치레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녀들의 길고 긴 sns 대화가 부럽게 느껴집니다.

살짝 외로운 기분이 들었지만 아내와 친구들의 만남을 응원하고 싶어 졌습니다.

부디 지금의 모습이 아닌 천진난만하고 철없던

그 시절 그때 모습과 기억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1년, 365일 중 단 하루,

나이를 먹어 갈수록 의미를 잃어가는 생일,

이 날, 아내가 만난 추억과 우정이 나에게도 작은 기대감을 남겨줍니다.


'나도 찾을 수 있을까? 청춘, 그때 그 기분......'




혹시나 이렇게 많은 선물을 받았으니 내가 주기로 한 선물은 잊었으면 하는 소박한 기대도 가져봅니다. 

(는 개뿔 그 날 이후 하루에 세 번씩 얘기합니다. 언제 주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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