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든 남자

플로럴 작전

by 류민

"이 꽃 얼마예요? 만 원어치 주세요."


어린 시절 동네에서 비단결 같이 고운 꽃잎을 한 잎 두 잎 따서 모아 엄마에게 선물했다. 꽃잎을 받은 엄마의 눈빛은 빛나지 않았다. 다음날이면 그 꽃잎의 행방은 묘연했지만 아이는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 아이는 반짝이는 20대가 되어 가까운 꽃집에 들러 월급의 일부를 꽃에다 썼다. 그 순수했던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잠시 피어 있다가 내 곁을 떠날 꽃이었지만 피어 있을 때만큼은 잔잔한 위로가 되었다. 꽃잎이 저무는 순간을 감지할 때마다, 잎을 한 장씩 떼어내며 사라져 가는 아름다움의 그 찰나를 간직했다. 그리고 잠시 빛을 머금었던 꽃잎을 책 속에 눌러두었다. 시간이 지나 마른 기억을 조심스레 꺼내어 하나의 시간을 남겼다. 여유가 되면 편지와 함께 주변인들에게 선물했다.


꽃을 선물하는 드라마 속 남자들을 보면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나도 연인이 있었지만, 꽃 한 송이를 청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당당하고 활기찬 이미지로 비치고 싶었기에 꽃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연약함으로 비칠까 어색했다. 그야말로 스스로 만든 이상한 선입견이었다.

그리하여 다른 쪽으로 꽃을 향한 욕망을 채웠는데, 기능성은 둘째치고 '꽃을 든 남자' 샴푸를 고집했다. 가방이나 학용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꽃그림이 가득한 '키스 캐드슨' 제품을 사용했다. 꽃무늬 빗 거울 세트와 꽃 지갑, 꽃 가방, 꽃 우산, 꽃 연필... 특히 꽃바지를 입고 약속 장소에 나가면 친구들이 한 마디 했다.

"쫌!!"


그렇게까지 꽃을 짝사랑하게 된 건 왜일까.


"돈 아까워라~ 금방 시드는데 꽃은 뭐 하러~ 꽃 사는 돈이 제일 아깝데이~"

엄마는 달콤한 향기가 나는 '프리지어'와 '안개꽃'을 참 좋아했다. 대학생 때 여기저기 알바를 하며 엄마에게 꽃을 선물했다. 한 번도 뭐 갖고 싶다며 나에게 사 달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뭘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그때의 나는 왜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돈이 아깝다며 한사코 꽃을 거절하던 엄마는 자주 이런 말을 했다.

"꽃 받아 보는 게 소원이다."

나도 엄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생겼구나 싶어 퇴근길에 꽃집에 들러 자주 꽃을 사다 날랐다. 한 번은 꽃병에 꽃을 손질해서 꽃아 두는데 엄마가 흘깃 거리며 물었다.

"니 내줄라고 산 거 아니제? 네가 좋아서 사는 거 맞제?"

아뿔싸, 들키고 말았다. 엄마는 뒤에만 눈이 달린 게 아니라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는 외계인이었다.

더 이상의 변명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꽃 받아 보는 게 소원이라며?"

엄마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새물새물 웃으며 그런다.

"너 말고 남자한테~"




결혼과 동시에 꽃병은 창고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이 키우는 집에 꽃병은 위험과 동시에 사치라며 내가 먼저 꽃을 배신했다. 남편에게 나름 기대했는데 그는 내가 꽃이라며 돈을 아꼈다. 아쉬움은 뒤로하고 꽃보다도 예쁜 딸에게 머리에서 발끝까지 꽃 칠을 해댔다. 아이에게 꽃무늬 드레스를 입혀서 밖을 나서면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듯 아이 화보촬영이 일상이었다. 이젠 아이들이 자라서 꽃이 다시 나에게로 왔다.

햇살만큼 따사롭고 밤달만큼 깊어진 어느 날 집안 청소를 하다가 창고 구석에 방치된 꽃병을 발견했다. 눅눅한 공기 속에서 은은하게 번지는 묵은 향이 코끗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것들을 소중한 보물인 마냥 꺼내어 물로 깨끗이 씻고 식탁에 올려 두었다. 투명하고 새파란 병 속에 내가 보였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맺혔다. 뜻 모를 억울함이 마음을 짓눌렀다.


"앞으로 매달 꽃을 받고 싶어." 용기가 필요했다. 뜬금없이 통보만 하고, 그는 묻지 않고 대답만 했다.

"그래. 월급날마다 꽃 사 갈게." 건조한 말투였지만 약속은 선명하게 맺어졌다.

"어. 더도 말고 딱 2만 원어치만!"



그렇게 한 달 한 번 꽃을 든 남자는

샴푸의 요정이 아니라, 꽃의 요정이 되었다.


둘만의 꽃 데이를 즐기면서도 나는 생트집을 잡았다.

"아우, 이번 꽃 너무 양 많다. 잡다한 거 다 꼽아 주셨네~ 꽃 병을 더 늘릴 순 없어. 다음엔 심플하게 특이한 꽃으로 해 줘. 센스는 있으시네. 꽃 밑 티슈에 적셔서 물방울도 달아주시고."

"지난번 꽃집은 문을 닫았네? 오늘은 회사 근처에서 샀는데 꽃집 사장님 연세가 좀 있으시더라. 국화꽃이 많았어."


"우와, 이 꽃 정말 화사하다. 꽃 말이 뭐래?

"그게 뭔데?"

...


"난 장미 별로야. 장미 빼곤 다 돼."

"이번엔 사장님이 바뀌셔서 서양 장미를 주셨는데, 꽤 특이하고 예쁜 것 같다. 꽃도 꽤 오래갈 거라고 하시네. 자주 가니까 꽃 보존제도 4개나 넣어 주셨어." 통화 너머로 그도 즐기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사실 꽃은 받을 때 보다 살 때 더 설렌다. 받아주는 대상이 있으면 더욱 그렇다. 꽃을 건네기까지 내게 머무르는 향기는 은은하고 비밀스럽게 설레임을 주었다.


감정 표현에 서툰 40대 중년의 남자가 꽃이 예쁜 것을 알아간다. 한 달에 한 번 낯선 꽃 가게의 문을 수줍게 열고 꽃집 사장님들을 만나며 꽃말 덕담을 나눈다. 나의 은밀한 작전은 꽤 근사하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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