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작업실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튤립, 수선화, 히야신스, 라넌큘러스. 색과 향이 진한 꽃들이 유난히 많은 계절이다. 게다가 작고 여리고, 가늘기 까지 한 이 꽃들이 어쩜 추위도 완전히 끝이 나지 않은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가장 먼저 언 땅을 가르고 나올 수 있는 것인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많이 기다렸을 것이다. 서둘러 봄이 와 제 예쁨을 뽐낼 수 있길, 어서 자신의 순서가 되길 기다렸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비와 추위와 바람으로 똘똘 뭉쳐진 겨울의 시간들이 야속했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꽃은 만들어진다. 봄에 피는 꽃들은 하나 같이 구근(球根)을 가지고 있다. 알 처럼 생긴 그것에 꽃으로 피어날 생명이 다져진다. 겨울이 혹독할 수록 알은 더 단단해 지고, 그럼에 건강한 꽃이 그 속에서 솟을 수 있다.
봄은 길 듯 짧다. 꽃시장의 꽃은 두어달 일러 나오기에 이미 1월 부터 꽃시장은 봄이다. 개나리를 시작으로 2월이면 조팝과 설유화가 나오고 3월이면 꽃시장에서 벚꽃은 만개한다. 이 때의 꽃시장 풍경은 이채롭다. 사람들은 분명 코트에 목도리에, 겨울 옷으로 꽁꽁 싸매고 있는데 매대에 진열된 꽃들은 하나 같이 봄이다. 플로리스트들은 각자 자신이 구입한 꽃들을 어깨에 걸치고 시장의 곳곳을 누빈다. 일년 중 이 무렵이 꽃시장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시기일 것이다. 4월과 5월은 꽃의 절정이다. 하우스에서 재배된 꽃들과 제 철을 맞아 밭에서 길러낸 꽃들이 꽃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수입 꽃들도 마찬가지이다. 매주의 수요일은 멀리서 비행기를 타고 온 꽃들이 세관을 통과하여 시장에 풀린다. 이 무렵은 봄의 웨딩 시즌과 가정의 달 시즌이 맞 물리며 그야말로 정신 없이 바쁘다. 그러나 이 생동의 시간이 오래면 좋겠지만, 이른 봄을 맞은 만큼 여름 또한 이르게 찾아온다. 용담과 알륨, 투베로사가 앞장서 여름이 왔음을 알린다. 이 무렵이면 꽃도 사람도 쉬어간다. 봄의 북적이던 손님도 잦아들고 야외 예식도 뜸해진다. 작업실의 꽃 양은 반으로 줄지만 이 나머지의 반이 무척이나 신경이 쓰인다. 꽃은 더위에 예민하다. 쉽게 지치고 잎은 자주 무른다. 사람과 똑같이 꽃에도 습진이 생긴다. 장미와 같이 잎과 잎이 포개진 꽃들은 그 틈에 꽃의 숨으로 채워진 습기가 쌓이고 이것으로 곧 꽃잎이 물러지게 된다. 건조해야 하지만, 너무 건조해서도 안된다. 작업실의 온도를 한껏 낮춰 서늘하게 맞춰 주어야 하지만 너무 서늘해서도 안된다. 작업실 밖과 온도 차이가 너무 나버리면 작업실 안에서는 괜찮더라도 문 밖을 나서는 순간 꽃이 고개를 숙이고 생기를 잃어버린다. 여름은, 꽃에게도 플로리스트에게도 고된 계절이다.
다시 공기가 차가워지길 기다린다. 그래서 가을은 반갑다. 봄 꽃 보다야 종류는 적지만 가을 꽃은 유난히 단단한 느낌을 준다. 다양한 품종과 색깔을 가진 국화과 꽃들이 가장 많고 맨드라미, 금잔화 같은 친숙한 우리 말 꽃들이 많다. 그리고 낙엽, 갈대, 억새처럼 자연에서 거저 주어지는 소재들도 많다. 마르고 건조한, 그 바스라한 느낌을 나는 좋아한다. 꽃의 향기 또한 특이해서 잎과 줄기에서 뿜는 그 쌉싸한 향이 무척이나 좋다. 모두가 아쉬워하듯 그러나 가을은 짧다. 한껏 녹아들다 보면 어느새 기온은 한참이나 내려와 있다. 언제왔나 싶게 그렇게 조용히, 가을은 흩어지듯 지나간다.
이내 가을의 자리는 겨울의 차지다. 겨울의 작업실은 말할 것도 없이 춥다. 손은 곧고 코 끝은 시리다 못해 얼음 조각을 얹은 듯 하다. 추위를 온전히 견디며 꽃을 꽂는건, 아무리 꽃을 사랑하는 플로리스트라 할지라도 괴로운 일이다. 꽃은 9℃ 전후를 가장 좋아한다. 난방을 하지 않은 작업실은 그 자체로 꽃을 위한 최상의 공간이다. 한 마디로 플로리스트는 냉장고 안에서 꽃을 꽂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째, 꽃이 좋다는데.
연말의 분주함에 플로리스트들은 바빠지고, 해가 바뀌는 서운함은 꽃에게도 사람에게도 차이 없이 찾아온다.
플로리스트는 늘 조심스런 눈으로 아침마다 꽃에게 안부를 묻는다. 간밤에도 잘 지내셨는지요. 상전도 이런 상전이 없다. 플로리스트야 말로 꽃들의 집사다. 그것들은 여리고 예민해서 언제든 쉽게 토라질 수 있다. 그러지 않기 위해 꽃집사들은 온도와 습도, 꽃을 자르는 가위와 담그는 물통 등의 청결에도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쩌면 이런 수고는 자연의 것을 가져다 쓰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일 것이다. 꽃을 대하는 사람은 그럴 것이다. 이렇게 자연을 온 몸으로 맞으며 그것이 오고, 그리고 감을 느낀다. 계절마다 다른 꽃을 만나고 그것에 맞게 다룬다. 아프거나 상처나지 않게 언제나 노심초사 살피고 보듬는다. 갖은 노력으로 최고의 예쁨을 빛낼 수 있길 바라고 또 바란다. 그리고 그 예쁨이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온기가 되고 사랑이 되고, 꽃을 받은 이도 선물한 이도 그 때 만큼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되어주길 기대하고 고대한다.
플로리스트에겐 봄도 여름도 가을도 그리고 겨울도,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