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이언 Feb 04. 2021

가을을 가을에게

신부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조심스레 내게 내민다. 청첩장이었다. 드물지만, 청첩장을 주시는 신부들이 있다. 이럴때면 마치 나역시 결혼식의 일원으로 초대를 받는 것만 같아 기쁘고 설렌다. 신부와 웨딩 플로리스트의 관계가 단순히 고용과 피고용이라는 이분법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포용적인 것으로 확장되는 느낌이다.

신부의 이름은 '가을'이었다. 가을에 있을 가을 신부의 결혼식, 청첩장에 있는 그녀의 이름을 보니 계약서를 통해 보았던 것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그녀에겐 어떤 꽃이 어울릴지, 예식의 공간은 무엇으로 채울지를 고민해 본다. 웨딩 플로리스트는 매 예식, 신부를 꽃으로 담고자 애쓴다. 흔히 말하는 '컨셉'은 그렇게 시작된다. 칸칸이 나눠진 가격표에 따라 정해진 샘플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취향과 개성을 통해 긴 시간을 두고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한참을 이름인 가을과, 동시에 계절인 가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을에 태어나 가을이란 이름이 주어졌고 그래서인지 마냥 이유 없이 가을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결혼도 가을에 한다. 온통 가을 이야기 일색이었던 그 순간 이미 내 마음은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에게 가을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우선은 낙엽과 갈대를 모아야 한다. 가을이면 지천에 널린 것이 낙엽과 갈대이지만 자연 그대로의 것은 쓸 수가 없다. 꽃 시장에서 정식으로 유통되는 것, 오로지 꽃 농부의 손에 의해 씨 뿌려지고 길러진 것만 쓸 수 있다다. 예쁘게 말려진 낙엽, 바스라질세라 조심스럽지만 그게 매력이다. 갈대와 억새는 플로리스트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억새는 은빛을 띄고 한 점에서만 피어난다. 반면 억새는 탁한 색으로 세로로 졸졸이 갈라지듯 피어난다. 이 둘은 따로 써도 좋고 함께 써도 그 아름다움에는 변함이 없다. 어쩌면 대부분이 무심히 지나칠 낙엽과 갈대와 억새다. 하지만 이는 꽃 시장에선 귀한 존재들이다. 출하되는 양은 적은데 쓰겠다는 사람은 많기 때문이다. 이 맘 때면 플로리스트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가을을 담고 싶다는 생각말이다.

그렇게 구한 갈대는 나의 작업실에서 익어간다. 쓰기 좋게, 보기 좋게 나름의 정성을 덧 입힌다. 일주일 쯤, 바람이 잘드는 서늘한 곳에 두면 자연에서의 모습과 가장 닮는다. 그때를 놓쳐서는 안되기에 예식 일자를 염두에 두어 빗나감이 없도록 한다. 이러한 과정들이 염려와 수고일지 모르지만 그 속에서도 분명 기쁨도 즐거움도 있다. 갈대가 익어가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보는 재미란 쉽게 알지 못할 것이다.

예식의 준비는 이렇듯 절제된 흐름을 가지며 이어진다. 하나라도 틀어지면 어쩌나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지만, 혹여 무엇하나 삐끗하여 놓친 점이 있더라도 신부들은 대부분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준다. 교감일 것이다. 두 세달 동안 예식의 준비를 함께 하며 서로의 마음이 가고, 옴을 반복하며 그 속에서 생겨난 진심은 서로에게 교차되어 마음에 내려 앉는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들이 모여 예식의 날은 어김없이 다가온다.

이른 아침 부터 꽃들을 제 위치에 놓고 공간에 어울리게끔 손을 본다. 미리 구상한 대로, 흐트러짐 없이 꽃들은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무엇 하나 허투루 볼 것이 없지만 '꽃길'은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길을 따라 신랑과 신부, 두 사람은 각자 입장하지만 함께 걸어 나온다. 두 사람의 시작이 새롭게 쓰여지는 곳이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이나면 언제나 그랬듯 플로리스트들은 공간의 한 켠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제 우리는 무대 아래로 내려와 오늘의 주인공들이 채워줄 이야기를 멀리서 지켜본다.

가을의 신부는, 플로리스트들이 만들어 놓은 가을 속으로 걸어 갔다. 오늘의 하루가 그녀에게 어떻게 물들지 조심스레 기대 해 본다.

어쩌면 사람들은, 꽃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줄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아침 동안 어떤 일을 꾸며 놓았는지는 모를 것이다. 당연히 오늘의 공간을 만들기까지도 어떤 수고의 시간을 보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일에 개의치 않음은, 이것이 바로 웨딩 플로리스트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력으로 온전히 두 사람이 빛난다면, 초대 받은 사람들 또한 꽃을 통해 기쁨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꽃과 함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