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읽는 도시, 마라케시 Cont'd ('17년 3월 20일)
마라케시에 여행 오는 사람들은 주로 무슨 기대나 생각을 하고 올까.
사실 나는 아무런 기대 없이, 당일 아침까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왔다.
나도 그랬고 조아오랑 제이디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당일에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어느 곳이던 온종일 걸어 다니면 몸이 지치기 마련이다. 나도 오늘은 다리가 아프다. 아니 허리가 아프다.
그렇지만 이곳은 육체적인 피로보다는 정신적인 피로가 더 압도적인 것 같다.
모로코란 나라는 어느 상점을 가도 판매원에게 흥정해서 더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인데
마라케시의 제마 엘프나 (Jemma el-Fna) 광장이 위치한 메디나 (Medina)에는 이런 노점과 상점이
개미 떼처럼 모여 있다.
상점에 들어가기 전에 가벼운 멘탈 스트레칭은 필수. 하하.
동대문보다 더 혼잡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상점이 있어서 길 잃어버리기에는 아주 딱이다.
평소에 여행하면서 일부로라도 길을 잃고 이곳저곳 구경하는 걸 즐기는 나에게는 진짜 안성맞춤이다.
데이터도 없고 지도도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보는 것과 듣는 것에만 의지하는 것!
요로 조리 걷다 보면 종종 보이는 당나귀와 수레.
가까이 다가가도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마냥 신기하고 귀여웠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아프기도 했다.
튼실한 말도 아니고 당나귀가...라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언젠가는 너만의 공간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계속 걸었다.
한참 걷다가 어느 상점 앞에서 마주친 고양이.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다. 어쩜 이렇게 하얗고 느낌있니.
상점 판매원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 고양이 한 마리로 충분했다.
상점 안에는 알록달록한 소규모의 가구랑 인터리어용 액세서리가 있었는데 정문에서부터 느껴지는 아우라에 마음 약해진 나.
여기서의 흥정은 포기하고 다음 상점으로. 총총,,
코너를 돌아 큰길가로 벗어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영어.
헬로우! 외얼 얼 유 프롬?
모로코에서 이 문장을 듣다니. 발음도 영국식이어서 나 같은 여행자구나!..라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지만 옆에 두 팔 벌려 활짝 웃고 있는 사람은 현지인이었다. 깜짝 놀라서 어떻게 영어를 이렇게 영국식으로 하는지 물어보니 영국에서 공부하다가 지금은
모로코에서 관광 가이드로 일하고 있다고 설명해줬다. 몇 마디 주고받은 후 인사하고 큰길가로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오늘은 한 달에 한 번씩 하루 열리는 레더 마켓이 열린 날이라고, 찾기 어려운 곳이니 직접 안내해주고 싶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워낙 오늘 여행은 별생각 없이 시작해서 그런지 우리 셋 모두 기분 좋게 오케이를 했다.
스토리는 여기서부터 시작. '오케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기 무섭게 옆에 지나가던 현지인을 붙잡더니 우리를 안내하라고 했다. 분명히 직접(?!) 안내해주고 싶다고 했는데..?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바통을 받은 사람은 영어를 거의 못했다. 단지 "컴, 컴, 아이 쇼 유".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 설마 납치라도 당하겠어~하는 심정에 모든 걸 내려놓고 따라가보기로 했다. 10분 정도 걸었다.
꼬불꼬불한 길을 아무리 지나도 도착하지 않는 게 이상해서 중간에 말도 걸어보고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보기도 했는데 영어를 거의 못하는 사람한테 대화를 시도해보는 건 맨땅에 헤딩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로부터 약 5분 후 또 다른 현지인이 바통을 받았다. 다행히도 이분은 영어를 할 줄 알았고 우리는 레더 마켓이란 곳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한테 허브를 하나씩 손에 쥐여주고는 얼마나 향긋한지 맡아보라고 하길래 맡아봤다. 향긋했다. 신선하기도 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표정을 짓자 선물이라고 건내주는데 사실 손에 냄새가 밸까 봐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하하. 여기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지키는 것보다는 열심히 태닝하고 있는 왕 노릇 같았다. 강아지한테 가볍게 웨이브 해주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사기였군..하하하.
사기당하는 중이었지만 애초에 마음을 비워서 그런지 화가 나지는 않고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어디까지 사기 치는지.
레더 마켓의 규모는 정말 컸다. 한 달에 하루 열린다고? 말도 안 되지. 마켓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고 가죽을 제조하고 말리는 공장 같았다. 제품화된 가죽은 없고 널빤지처럼 말리고 있는 가죽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하는 사람 몇몇 외에 구경 온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우린 가죽을 제조하는 사람이 있는 방에 들어가서 한번 구경하고, 마켓을 쭉 돌아본 후 여기서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자칭 가이드한테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가려고 했다. 그때 역시는 역시구나. 돈을 달라고 하는 아저씨. 모로코에서의 첫 흥정 경험은 여기서 시작됐다. 1인당 한화로 약 2만원씩, 총 6만원을 달라고 하는 아저씨. 어림도 없지. 우리는 여기서 우리만의 와일드카드를 꺼냈다. 멀리서 온 학생들이라 돈이 몇 푼 없다. 레더 마켓에 오기 전에 벌써 사기를 한번 당해서 돈이 거의 없다. 등등. 결국 우리는 총 2만원을 주고 도망쳐 나왔다. 모로코까지 와서 별의별 경험을 다 하는구나. 하하하.
그래도 너무 재밌었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더 특별했고. 평생 잊지 못할 듯.
짧은 시간동안 많은 걸 느끼게 해준 마라케시.
너무 보고 느낀 게 많아서 여기서 마라케시의 두 번째 이야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