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제 꿈이 엄마는 아니잖아요?
어렸을 때는 결혼도 출산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이란 건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나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내 자녀에게
혹여 상처를 남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나에게는 수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몸도 마음도 온 신경이 아이에게 곤두서 있었고
밤낮으로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의 작은 세상에서
주양육자인 나는 절대적인 존재임이 분명했다.
수술실에서 갓 태어난 아이를 보았을 때였는지
수유실에서 아이를 처음 품에 안아보았을 때였는지
뱃속에서 힘껏 움직이는 아이의 태동을
느끼고 나서였는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자연스럽게 아이는 삶의 전부가 되었고
어느덧 엄마인 내 모습이 익숙해졌다.
그러나 나의 세상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훈련 일정으로 인해 원래 이주였던
산후조리원 기간을 줄여 일주일의 몸조리를 마치고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초보 엄마였던 나는
친정에 올라와 쉬고 가라는 부모님의 당부에도
신혼집을 지키며 그가 일을 쉬는 주말조차
아이와 단 한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강요한 적 없지만 그때는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내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작은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자
온 마음을 쏟을 존재가 필요했던 것일지 모르겠다.
아이가 태어나고부터는 온종일 아이의
생활 리듬에 맞추어 생활했다.
새벽에도 일어나 모유수유와 유축을 하고,
수유하다 품에서 잠이 든 아이를 안은 채로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아기띠를 한 채로
집안일을 하고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 역시 퇴근 후에도 지친 몸을 이끌고 함께
아이를 돌보느라 많이 힘들었다는 걸 알았지만
다독여주지 못한 부족한 아내였음을 인정한다.
그는 미뤄온 군복무 중이자 직업군인이었고
얼마 후면 정해진 복무 기간은 끝이 날 것이었다.
우리는 그가 군복을 벗고 다시 사회에 나갈 것인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로 잦은 이사를 다니며
군인가족으로 살 것인지에 대해 의논했다.
이미 아이가 태어난 지 백일도 되기 전
이전 신혼집에서 갑작스러운 다른 지방으로의
이사를 겪은 그와 나는 서로의 꿈과 가장 중요한
아이의 안정을 위해 애초에 결정한 대로 복무기간이
끝나면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걸 선택했다.
코로나로 전반적인 사회 경제가 불안한 상황에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군인이라는 선택지를
포기하고 내린 결정에 시댁에서는 내심 나에게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주부로 살 것을 바랐다.
아이의 돌이 되기 전 미뤄온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겨우 200일을 넘긴 아이를 데리고 주말마다
3시간 거리를 차로 오가며 결혼식 준비를 시작했다.
매일 일과 육아, 결혼식 준비까지
서로를 돌볼 시간조차 부족했던 젊은 부부,
초보 부모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넘어가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남이 되어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그제야 미처
하지 못하고 삼켜졌던 말이 입에 맴돌았다.
"우리 참 많이 힘들었지."
싱글맘이 되고는 엄마가 아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생각을 더욱 자주 한다.
어쩌면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도
다 잊어버렸는지 모른다.
나의 엄마가 그래왔듯, 세상의 모든 엄마가 그렇듯
'엄마'라는 단어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세계에
들어온 기분이다.
그렇게 나는 어떻게 엄마가 되는 줄도 모르고 엄마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