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상처도 회피도 각자의 몫
본식 드레스 셀렉을 앞두고 그와 연락이 두절되었던 적이 있었다.
일주일 만에 어렵게 연락이 닿은 그를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혼자 신혼집으로 내려갔다. 그의 회피라는 습관에 넌더리가 났다.
이미 청첩장까지 나온 마당에 결혼식을 미룰 수도 없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힘겨운 감정싸움을 이어갔다.
그럴수록 우리 사이의 믿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아이가 태어나고 많은 게 달라진 우리의 상황과
나의 변화를 그에게 털어놓으며 도움을 요청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 그에게 들은 한 마디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나를 온통 생채기 내는 일이 되었다.
"너는 산후우울증이 아니라 그냥 우울증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혼식 일정을 강행했다.
그는 결혼식 준비가 다툼의 결정적 원인이라 여겼고
나 또한 결혼식 전날까지도 결혼식만 끝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다시 의미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고,
핸드폰 너머 그는 그저 이 상황을 넘기고 싶어 했다.
"일단 내일 결혼식 끝나면 이야기하자."
그의 말에 갑자기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 싸움은 끝나지 않는 거구나. 또다시 반복이다.'
당장 내일이 오면 신부대기실에 앉아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꽤 오랫동안 그가 던진 말 한마디가 돌덩이로 남아
온종일 마음 안에서 굴러다녔다.
나를 가장 이해해 주길 바라는 사람에게 힘겹게 꺼내놓은 상처들은 어느새 내 약점이 되어 있었다.
사실 나도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었기에 그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불안은 여전히 나를 어둠으로 끌어내렸다.
연애 시절부터 그에게 나의 아픔을 기대어 의존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곤 했었다.
그 모습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에게 죄책감과
더불어 때때로 빚진 기분마저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 이면에는 항상 그런 그의 마음이 언젠가 변할까 두려웠다.
한 번씩 찾아오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울이 내 전부가 될까 전전긍긍했다.
그 안에서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는 점점 제 몸집을 부풀렸고 그 거대함에 잡아먹힐까 늘 숨고 감추느라 십 대의 전부를 써버렸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원가족에서의 상처가
새로운 가족에게까지 옮겨질까 무서웠다.
나의 우울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짐이 될까 겁이 났다.
어떤 이별이든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하지 않은 이상 책임은 두 사람 모두의 몫이다.
그 당연하고 분명한 사실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안 좋은 감정이 밀려오면 기어코 회피를 택하고야 마는 그의 고집에 늘 져줄 수도, 마냥 기다려줄 수도 없었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의 상처를 대신 보듬어줄 수도, 한없이 받아주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우리는 부부였지 서로의 부모가 아니었기에.
우리의 이혼에는 수많은 이유들이 있었지만
지나간 선택을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쨌든 그와 나는 정말 남이 되었고 남겨진 나의 마음을 돌봐야 하는 건 분명 내 몫이었다.
오랜 시간 외면하고 방치한 책임을 묻는다면
내 탓을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다시금 그 상처를 드러내기로 마음먹는다.
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순간마저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괜찮아지고 있는 거라 믿는다.
이제 내 안에 소화되지 않는 이 상처들을 마주해
극복해 낼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