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중.모.색.

내 인생은 나의 것

by 류다


십 대 후반, 이십 대를 돌아보면서 수많은 생각이 교차된다.


남 탓, 부모 탓, 친구 탓.

자신의 인생이 잘못된 것은 본인의 탓이 큰데도 사람들은 집안환경, 부모 탓을 하거나 부모님들은 자녀의 친구 탓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는 부모님 탓은 가끔 한 것 같다.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존중받으며 자랐다면 그렇게 엇나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이것도 어불성설인 게, 그렇다면 나의 형제들이 모두 반항하면서 비뚤어졌어야 하는데 그렇지만도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빠는 아버지와 많이 싸우고 늘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나를 제외한 삼 형제는 모두 재수도 하지 않고 순탄하게 대학을 나왔고 제때 졸업해서 취직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의 잔소리에 질려서 교사라면 치를 떨었고 절대로 선생은 되지 않겠다고 입을 모아 말했지만, 언니 둘은 교사자격증을 땄고 사교육이든 기간제 교사든 교육직에 종사를 했다. 막내인 나는 뒤늦게 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인생이란 정말 아이러니하다.


내 고등학교 시절의 단짝 친구는 나의 솔메이트였고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에, 내가 암시를 잘 받는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 친구의 탓을 하고 싶지는 않다. 야간 자율학습은 '자율학습'인데 왜 강제적으로 해야 되는지, 그런 말을 먼저 한 것은 내 친구다. 담배를 피우며 책과 인생을 논했던 조숙했던 내 친구. 물론 내가 잘못된 길을 걷도록 종용한다거나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 단지 책을 많이 읽어서 비판적인 사고를 했을 뿐. 그 친구는 러시아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서서히 내 삶에서 사라져갔다. 삼십 대가 되어서도 나는 그 친구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를 궁금해했고 가끔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나의 소울메이트. 후에 대학 동문을 통해 독일로 유학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십 대 중반 이후로 그녀와 나는 서로 부재자가 되어버렸으나, 아직도 가끔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래, 인생이 쉽지 않았던 것은 결국 나의 선택이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직업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햇병아리가 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요즘처럼 아르바이트 자리가 흔하지도 않았고, 고생을 못해보고 인생을 책으로 배운 터라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자신의 성격과 사회 적응력을 잘못 판단했고 한국 사회의 현실에도 무지했다.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똥고집을 부린 것은 그저 객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부딪쳐서 처절하게 깨지기 전까지는.


교차로, 매일신문 광고란을 뒤적이며 일자리를 찾았지만 나를 원하는 곳은 잘 없었다. 이력서에 쓸 것도 없었고, 이력서를 내도 경력이 없다고 자꾸만 떨어졌다. 사무직에 취업을 했다가 눈치 없다고 잘리기도 하고 며칠 일하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오기도 했다. 한의원에 취직이 되었는데 부항이나 이런 걸 보니 일할 자신이 없어서 가지도 않았다. 친구의 영향일지 노동 현장을 보고 싶다고 영세한 생산직에 취직했다가 하루 가고 그만두었다. 거기 일하시는 분들도 앞날이 창창한데 왜 이런데 오냐고 걱정해 주셨다.

아버지는 강원도에서 병원 하시는 외삼촌한테 가라고 하셨지만, 엄마는 외숙모 눈칫밥 먹는 거 싫다고 하셨고 나도 그 멀리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많은 날들을 오렌지색 스탠드를 켜놓은 주황색 방주 같은 다락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생각에 빠져 무위도식했다. 대낮에도 커튼을 쳐놓은 작은 다락방은 나만의 세계였고 나의 도피처였다.


이런 내게도 비교적 오래 일하던 곳이 있었는데 시내 중심가에 있는 작은 레코드 가게였다. 한 1년 정도 일했었나 보다. 가끔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한데, 음악을 좋아하던 라디오 키드였기에 오래 버티지 않았나 싶다. 트로트는 질색이었고 록 음악과 아트락에도 관심이 많았다. 가게의 성깔 있는 왕 언니와 트러블 끝에 거의 쫓겨나다시피 나왔고, 다른 레코드숍에서 아르바이트를 잠시 하기도 했다.

당시 고졸자에겐 23살만 돼도 나이가 많다고 하고, 취직이 잘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 어린 나이인데. 경리 학원에 가서 타자도 배우고 컴퓨터학원도 다녔다. 하지만, 이렇다 할 경력도 없고 나이도 많다고 취직이 잘되지 않았다.

작은 사무실에서 잠깐 일하다가 스물넷에 다시 대학을 가기로 하고 공부를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하는 재수학원에 가고 싶지도 않았고, 퇴직할 때가 다 되어가는 아버지는 부모 등골 빼먹는다고 화를 내셨다. 단과학원과 도서관을 다니며 공부를 했는데, 역시 놀다가 공부를 하니 집중도 되지 않았고 고3 시절에 비해 형편없는 성적을 받았다. 그때는 학력고사가 아니라 수능시험을 쳐야 했고, 오히려 학력고사보다 시험이나 전형도 더 쉬웠는데 안타깝게도 노력도 운도 따라주지 않았다. 주변에 재수하려는 사람에게 웬만하면 재수를 권하지 않는 것은 내 경험담이기도 하다.


집안 형편도 그렇고 성적도 그렇고, 여러 가지를 고려하다가 전문대 컴퓨터 관련 학과를 지원했다. 문과 성향의 내가 비전이 있다는 이유로 이공계를 갔으니 공부하기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C, C++, Cobol.... 이런 프로그래밍 언어는 외계인의 언어처럼 나를 괴롭혔다. 실습 때는 잘하는 아이가 프로그래밍을 해놓고 나가면 그걸 보고 베끼면서 겨우 졸업은 했다. 당시 늦은 나이에 들어온 친구들이 3명 있었는데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하다가 입학한 친구들이었고, 그중에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다. 그래도 같이 어울릴 친구들이 있으니 외롭지 않게 학교생활을 했다. 프로그래밍을 잘하던 친구도 나이가 많다고 기업에 들어가긴 힘들었고 결국 컴퓨터학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들보다 나이가 많고 성적도 안되는 나는 오죽했으랴. 취직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그래도 전공을 살려 잠깐 컴퓨터학원에서 일하기도 하고 학교 방과후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교직이 적성에 안 맞았고 아이들을 다루는 재주도 없어서 학생 수가 자꾸 줄어들었다. 결국 눈치가 보여서 자진해서 그만두었다. 직업전문학교에서 1년 정도 광고디자인을 배우기도 했지만 나이가 많아서 취직은 어려웠다. 그것이 한국의 현실이었다.


점점 사는 것이 힘들어졌고 한때 하늘을 찌르던 자존심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취직이 안되면 시집을 가면 된다고 그랬던가. 어른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안 들었던 내가 갑자기 마음이 확 바뀌었던 것이 스물아홉. 독신주의를 고집하던 내가 결혼을 생각하게 된 것은 당시에는 지나치게 늦은 나이였다.



# Bgm. 그것만이 내 세상/ 들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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