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는 꿈 속에서 바다표범이 되었어.
유리는 눈을 감고 있었어.
눈을 감고 있다는 생각조차 한동안은 하지 못했지. 그저 주변이 너무 어두웠고, 왜 어두울까? 라는 질문을 곱씹고 있었어. 지금은 밤이기 때문일까. 블라인드를 두텁게 내려서일까. 안대를 썼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블라인드라는 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내리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어. 내린다는 건 어떤 행위인지. 애초부터 알고 있지 않은 것일지도 몰라. 답답해졌어. 주위에는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들려.이를 악물고 미간을 찡그렸어.
그 반동에 번뜩 눈이 떠져!
유리 눈 앞에 기괴한 생물의 시체가 보여. 이곳은 시체의 뱃속이야. 아주 오래되었는지 딱딱하고 악취도 나지 않아. 돌 냄새만 은은히 풍길 뿐. 시체 뱃속은 이미 누군가 모조리 파먹은 듯 휑하여서 범고래도 족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야. 혹시 누군가의 둥지는 아닐까. 이처럼 거대한 곳에 사는 생물이라면 위험해. 곧바로 그 시체를 벗어났지. 멀리서 본 시체는 마치 버스 같았어. 그러나 유리는 버스라는 게 무엇인지 몰라.
부글-부글. 어디선가 물방울 소리가 들려. 얼른 귀를 곤두세우고 주변을 경계했어. 한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안심하고 스트레칭을 시작했지. 꼬리를 흔들어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세차게 유성처럼 원형으로 회전하며 근육을 풀었지. 누군가 유리가 춤추는 모습을 봤다면, 감탄했을 법해. 아름다운 유선형의 몸이 일식처럼 가느다란 고리를 만들어 회전하면, 그 물결 사이로 미끈한 물방울들이 제 날개를 살랑거리고 암흑 속 미량의 윤기를 내뿜어. 유리의 몸짓 그대로 원을 그리면서.
지금 유리는 그 누구보다 헤엄을 잘 치는 바다표범이야.
자신이 있는 위치가 감이 오지 않아 위로 솟구쳤어. 희미한 불빛이 유리 몸을 스쳐갔어. 심해 속 생명체들. 별처럼 떠 있는 그 작은 빛은 한데 모여 은하수를 이루었어. 제각기 자전하는 그들은 깊은 해류가 내뿜는 입김에 따라 바닷물을 내쉬고 뱉으며 유영하고 있지. 작은 불을 한번 물어보았어. 투명한 몸 안에 흰 빛을 내뿜던 갑각류 하나가 유리 이빨에 물려 깨졌어. 바삭.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빛의 화학물질이 터쪘어. 작은 폭죽처럼. 연신 폭죽들을 터트리며 축제를 즐겼어. 톡 쏘는 맛이 꽤 괜찮아. 별미에 정신을 빼앗겨 숨을 참고 있다는 것도 몰랐지. 스물여덟 번의 폭죽을 터뜨렸을 때 그제서야 숨이 막혀왔어!
남은 힘을 다해 수직으로 솟구쳤어. 이곳은 너무 깊어. 끝없이 펼쳐지는 은하수. 지느러미 혈관에 서서히 거품이 끼는 듯해. 정신이 아득해져. 이렇게 죽을 수 없어. 그는 별이니까. 온 힘을 끌어내 발버둥 쳤어. 그런데 망할 해파리 떼를 보지 못한 거야. 촉수에 긁혀 피가 스며 나왔고 그 냄새를 벌써 맡았는지 뒤에서 추격하는 물뱀의 등골 서늘한 냄새가 느껴져. 하지만 수면이 보여. 조금만 더 올라가면 힘껏 숨을 채울 수 있어. 정신만 차리면 물뱀들 따위는 쉽게 죽일 수 있어.
호-오.
물뱀들이 자신들의 신호를 외쳤어.
곧 수많은 물뱀 떼가 그를 덮쳐와 몸을 휘감아!
사지가 묶인 그는 더는 솟구칠 수 없어. 정신이 아득해지고 발버둥이 멎어지는 중이야. 가라앉는 그의 이마에 문득 해초 더미가 내려앉았지. 흔들리는 해초 조각은 넘실거리며 그의 곁에서 춤을 추는 중이야. 춤사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날렵해지고 사나워졌어.
춤은 고대의 기억을 잇는 구전처럼 무언가 유리에게 말하려는 듯해. 어떤 형상은 사지를 내뻗으며 물에 빠지는 시늉 같았고 어떤 것은 형제가 갖춰지기도 전에 흩뿌려지는 듯 사라졌어. 그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형상의 중심에는 층마다 반복되는 두꺼운 여운이 남아있어.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옥죄는 뱀에게 말했어.
“난 이제 어른이야. 더 이상 너희들은 내게 고난을 강요할 수 없어.”
“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물뱀들이 한 목소리로 합창하듯 회답해. “넌 아직 어른이 아니야. 몸만 컸다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니지. 스스로의 삶도 감당하지 못하잖아. 희생해 본 적도, 사랑해 본 적도 없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어. 넌 이 심해 속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어. 우리들과 함께.”
“나에겐 여신이 있어. 나를 위해 온 몸을 바쳐 싸웠어. 그 여자는 거대하고 강인하고 누구보다 날 아낀다고. 너 같은 것들에게 더 이상 속박될 이유가 없어.”
유리는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 물뱀들은 당황하는 눈치야. 그리고 저희들끼리 소곤거리기 시작했지. 그동안 유리는 생각했어. 그 여자가 누군데?
“그 여자가 실존한다고 생각하나? 네가 갇힌 세상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산물일 뿐이야. 세상에 그 여자는 없어. 어리석은 아이야.” 물뱀들은 그를 더욱 옥죄기 시작해. 의식이 흐릿해져. 숨은 이미 바닥났어. 신음과 함께 혼잣말이 나왔지. “더-이상.”
유리 주둥이에서 마지막 물거품이 솟아올라. 물방울은 흐릿한 고리를 보이며 수면 위로 솟아올라. 곧 암초에 부딪혀 터지고 말았지.
터진 물방울.
별안간 물 끓듯 요동치며 커지기 시작해!
부글-부글. 거품은 수면에서부터 아래로 가득 번졌어. 거대한 물방울은 기둥이 되어 벌린 유리 주동이 안으로 잔뜩 밀려들어가! 오그라든 폐에 숨이 가득 찼지! 눈앞이 다시 선명해져. 몸을 감았던 물뱀들은 어느새 사라졌어. 유리를 감싸 안은 무수한 흰 거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더 이상 이곳에 있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