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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Aug 18. 2019

따개비 - 3 강변

여덟 개의 다리를 움직이며 글자를 썼잖아요. '영원을 주겠다'라고.



 나는 한동안 햇살이 밀려오는 동굴 벽에 주저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맞은편 벽에 기대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당연히 내 충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늘 미래를 위해 살아왔다. 그래서 오늘의 기분과 행복은 내일을 위해 반쯤 접어 두었다. 언젠가 나는 정체 모를 누군가와 결혼을 할 것이고 빚으로 집을 살 것이다. 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내 시간과 재산을 쏟아붓겠지. 그래서 늘 돈을 벌어야 하고 능력을 쌓아야 한다. 그럼에도 훗날 내게 남는 것은 늙은 육체와 쓰지 못할 재산뿐일 것이란 결론에 들면 삶이 허무해졌다. 누군가는 추억을 안고 살아간다고 했지. 하지만 기억이란 건 값 비싼 식사처럼 지나고 나면 손에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흔들의자에 늙은 몸을 눕히고는 착각일지도 모르는 과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현실을 도피한 실패자와 같았다 반면에 그들은 실패자가 아니었다. 과거의 영광 그대로 살아가니까.


 "과거를 산다는 건 어떤 건가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내 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늘 젊은 소녀의 모습으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당신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아들을 낳은 그때를 생각하나요? 그 추억을 떨쳐버릴 순 없나요?"


 그녀는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가 짧게 대답했다. "당신이 삶이 어떤진 모르지만, 내 삶을 말하자면 늘 같은 하루를 살아요. 어제는 아들을 낳고 잠이 들었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 긴 꿈을 꾸었죠. 방금 전 액자를 보았을 땐 갑자기 떠오른 그 꿈의 기억을 쫓아간 거예요. 그러자 내 몸은 늙어갔고 내게 어제는 점차 아들이 중년의 모습으로 날 떠나가던 그때로 변해갔죠. 어떨 때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나는 단지 기억을 표기하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사진 같다는 것."


 "당신과 반대로 나는 늘 변하는 삶을 살아요. 어제의 일은 다음날 오늘의 일로 채워지죠. 그래서 어제의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가요. 그래서 과거를 떠올리면 기억나지 않는 시간이 대부분이에요. 며칠 전에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내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요. 단지 추측할 뿐이죠."


 "나 역시 기억나지 않는 시간이 대부분이에요. 내가 가진 것이라곤 아이를 가졌던 하루밖에 없어요.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 어떻게 자라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아요."


"행복한 기억을 영원히 가진 당신이 부러워지네요.."


"아니에요.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그녀는 비명을 지르듯 내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 말투는 가시에 찔려 뱉는 신음처럼 즉각적이라서 나는 단번에 웃음을 거뒀다. 그녀는 미안해하는 듯한 내 표정을 보며 예의 비릿한 웃음을 짓고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가 그 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행복만이 아니에요. 그날의 고통과 놀라움 그리고 두려움도 있죠. 다시 한번 말하지만 행복했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이 아니에요. 잊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늘 변화하는 삶을 산다고 했죠. 그 안에는 행복하고 슬프고 아픈 기억들이 여럿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내 희로애락은 오직 이 기억 하나로 존재할 뿐이에요. 나는 벗어나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과 함께 이곳을 떠나고 싶어요. 늘 반복되는 하루는 내 생명력을 갉아먹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지금이 몇 시인지, 오늘이 몇 년인지 가늠이 가지 않아요. 나는 마치 돌에 굳어버린 따개비처럼 지금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짐작할 수도 없어요."


 그녀의 다그침은 날 혼내는 것처럼 느껴져서 항변하고 싶었다. 내 삶은 그녀가 짐작하는 것처럼 풍족하지 않다고. 그리고 그녀를 위한 연민인지, 아니면 날 위한 연민인지 그녀를 두둔하고 싶어 졌다.


 "당신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나 역시 지금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늘 내일을 위해 살아요. 하지만 내일은 지나간 과거만큼이나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오늘의 나를 돌이켜 보면 무엇이 남았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당신을 보며 혼란스러워졌어요. 그래도 당신은 영원하잖아요."


 "당신, 하늘에서 내려온 그 괴물처럼 이야기하네요."


 "그 거대한 문어 말인가요? 그것이 말을 했나요?"


 "여덟 개의 다리를 움직이며 글자를 썼잖아요. '영원을 주겠다'라고."


 그녀는 종아리에 묻은 흙을 가지런히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서둘러 일어났다. 그녀는 다시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산발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종종걸음으로 따라 걸어갔다. 터널의 끝자락을 넘었을 때, 주위는 급격히 밝아졌고 잠깐 눈이 멎었다. 새하얀 바탕 위로 잔상처럼 그녀의 뒷모습이 공중에 흩뿌려졌는데, 그 형체는 모래사장의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흩뿌려졌다를 반복하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강변 모래톱 위에 흠뻑 젖은 채 쓰러져 있었다. 사이렌 소리가 저 멀리 다가오는 중이다. 그녀는 과거를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성공했을까. 몸을 일으키는 도중, 손바닥에 날카로운 것이 박혔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빼고는 펼쳐보았다. 자잘한 상처 위로 금세 선홍색 피가 흘렀고 그 모양은 강아래 세상에서 문어의 춤사위 같았다. 그녀는 이 단어를 영원이라고 했다. 구급대원들이 무너진 대교를 봉쇄하고 강변의 사람들을 구조하는 동안에도 그녀를 찾지 못했다. 들것에 실려가는 도중 강변 돌바닥을 점령한 따개비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드러난 사진 귀퉁이가 보인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들것을 박차고 뛰어가 따개비 밭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따개비에 파묻힌 사진을 뽑아내 펼쳤다. 그녀다. 사진 속 그녀는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비릿한 웃음 그리고 또렷한 눈짓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달려오는 구급대원들의 발소리를 뒤로한 채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은 여전히 과거에 살고, 나는 현재를 살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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