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세계 2 하이힐의 무게감

또각-또각. 유리에게 하이힐은 몸의 위압감을 드러내는 송곳니야.

by 류인환

‘수고하셨습니다.’


말하듯 노트북은 제 허리를 꾸벅, 숙이고 잠들었어. 인사는 얕은 호흡을 일으켰지. 그 바람에 정성 들여 뒤로 넘긴 머리카락이 내려앉았어. 유리는 눈을 감아. 그리고 손을 들어 머리를 쓸었어. 공중에 뜬 유리의 손가락. 긴 마디를 펼쳐 머리카락 다발 사이로 착륙했지. 손가락은 검은 숲을 헤쳐 나가며 생각해. 이곳이 참 마음에 든다고. 두피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 때문인지 모발 안의 공간은 적당히 따뜻했으니까. 이곳에 기생한 채 영원한 낮잠을 자도 될 만큼.




반면, 눈을 감은 유리는 검은 손이 자신의 눈꺼풀을 스치고 상승하는 걸 느꼈어. 곧 두피에서 밀려드는 지릿한 손길.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듯 해. 유리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 손가락이 숲을 떠나자, 머리카락 몇 가닥이 다시 힘없이 내려앉아. 유리가 한번 더 손을 들어 쓸어 넘겨보았지만 소용없어. 마음에 들지 않았지. 팔을 책상에 얹고 턱을 괴고는 잠깐 상념에 잠겼어. 그리고 결론을 내렸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신을 방해하고 있다고. 그래. 그 누군가는 유리 머리카락을 툭툭 건드리는 중이야. 그리고 동시에 속삭였지!


오늘. 이대로 퇴근하면, 더는 정돈하거나 긴장할 일이 없어. 그러니 다시 머리카락을 쓸어 담는 부질없는 짓은 하지마.


유리는 암시를 따르기로 했어. 더는 숨이 느껴지지 않는 노트북을 집어 들고 가방에 구겨 넣었지. 유리가 몸을 의자에서 일으키려는 순간. 책상 구석. 철제 파티션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여. 검은 눈. 검은 머리. 하얀 피부. 딱히 별다른 구석이 없는 이목구비. 얼굴 양쪽의 점만 두드려져. 유리 눈 밑에 박힌 각각의 점은 사실, 누군가의 눈이야. 그와 함께 숨 쉬는 존재들 말이야.


유리는 비친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어.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지. 지금 철제 파티션에 비치는 일그러진 얼굴이 과연 자신일까 하는 것. 눈 앞에 보이는 저 눈은 자신 같지 않아서. 눈빛은 오히려 감시하는 듯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다고. 유리는 얼굴에게 물어보았어. 무슨 문제 있느냐고. 비친 얼굴은 대답이 없었지. 그저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거울 속 얼굴은 입술을 우물거릴 뿐이야. 마치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유리는 비친 얼굴이 정말로 자신에게 말을 걸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렸어.




파티션 틈으로 얼굴 하나가 보여.


옆자리 여사원. 지금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유리를 바라봐. 내게 무슨 용건 있어요? 하는 표정. 아마, 유리가 파티션 뒤에 숨어 그녀를 너무 빤히 쳐다본다 생각한 모양이야. 그녀에게 말하려고 했어. 널 쳐다본 게 아냐 라고. 유리는 숨을 한껏 들이마셨지. 목이 살짝 뒤로 젖혀지고 입술이 벌어지는 와중. 별안간 혓바닥을 깨물었어. 그 여사원과 말을 섞게 되면 오늘 할 일이 더 늘어날 것 같았거든.


여사원은 가끔 유리에게 말을 걸곤 했어.


유리 씨, 내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어요. 미안한데, 이것 좀 부탁해요. 유리는 늘 거절하지 않았어. 급한 일이 있다니까. 이런 상황마다 생각했지. 화려한 일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약속 장소에서 그녀를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 아름다운 일에게 폐를 끼쳐선 안된다고 생각했어. 어제까지는.


오늘은, 자신이 이곳을 먼저 떠나기로 결정했어.


이유를 대자면, 곤히 자는 노트북을 깨우기 미안해서. 그리고 누군가 말했잖아. 오늘, 더는 무엇을 정돈한다거나 긴장하지 말라. 중요한 날이니까. 그래서 유리는 그 여자가 눈을 살짝 찡긋하고, 미안한 입술로 한번 웃고는, 자신에게 등 돌리고 문 밖을 또각또각 떠나게 둘 수 없었어. 동그란 뒷머리부터 등허리까지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 그 아래 흰색 블라우스가 붙잡은 허리. 반등하는 골반. 검은 스커트. 미색 종아리. 발꿈치까지 이어지는 몸의 무게가 담긴 하이힐 소리. 또각-또각 하는 비아냥이 유리를 잘근 밟고는 멀어져 버리게 둘 순 없었어. 방 안에 남겨진 애완견처럼 목줄 같은 서류 더미에 묶인 채 사무실에서 홀로 저녁을 보내고 싶지 않아. 오늘만큼은.


여사원은 여전히 유리를 보고 있어.


마치 잘됐다는 듯이.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유리 눈을 붙잡아 뒀어. 그리고 입 꼬리를 끌어올렸지. 고광택의 붉은 입술이 조그맣게 쪽 하는 소리를 내며 벌어졌어. 새하얀 치아가 열리고, 그 사이로 붉은 혓바닥이 윤기로 번뜩거려. 그녀 목이 뒤로 젖혀지고, 숨과 말을 내뱉기 직전.


유리는 벌떡 일어섰어.


가방을 어깨 뒤로 넘기고 그녀에게 등 돌렸지. 거리는 성큼성큼 멀어졌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까지 내려가는 동안 유리는 그 순간을 계속 떠올리며 생각했어. 지금 사무실로 얼른 뛰어 들어가 파티션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면, 비친 얼굴은 흡족히 미소 지을지 몰라. 그리고 유리를 마주 보며 잘했다 말할지 모르겠다고.




craft heel.JPG 또각-또각. 유리에게 하이힐은 몸의 위압감을 드러내는 송곳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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