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이영 Apr 21. 2022

이응의 우주

4. 아니지, 참


    이응은 예상치 못한 때,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 소담한 꽃다발을 받았다. 송이송이가 큰 여러 꽃들로 이루어진 꽃다발이었다.

    “언젠가 너에게 한 번은 선물해 주고 싶었어. 마침 퇴고를 완전히 마쳤다길래.”

비읍이 말했다.

    이응은 꽃다발을 받아 들고는 스르륵 눈을 감으며 코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깊게 향을 맡으려 이응은 거의 꽃다발에 머리를 박은 채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후-음. 이름 모를, 하지만 어딘가 한 구석씩 익숙하게 생긴 꽃들은 자기만의 향을 내뿜으며 그 안에서 그들만의 오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퍽 향기로웠다. 이응은 다시 천천히 눈을 떠 품에 안은 꽃다발을 가만히 오래 들여다보았다. 송이송이 큰 꽃들 사이로 아주 자잘한 잎들로 이루어진, 언뜻 미모사 잎을 닮은 잔가지 하나가 이응의 눈에 들어왔다.

    ‘잎들을 훑어내고 싶다.’

그건 이응이 잔가지를 보자마자 찰나에 반사적으로 한 생각이었다. 아주 자잘한 잎들이 손안에 꽃송이처럼 쥐어지겠지.


    나뭇가지의 적당한 지점에 손을 두고 가볍게 주먹을 쥐어 나뭇잎을 훑어내리면 그 손 안에는 나뭇잎꽃이 생기곤 했다. 그렇게 손에 쥐어진 나뭇잎 꽃을 보려면 주먹 쥔 손을 비틀어 불편하게 보아야 했으므로, 어렸던 이응은 굳이 그 불편한 자세를 취하느니 자신에게 그 행동을 보이며 알려주신 조부의 손 안의 나뭇잎 꽃을 보는 것을 매번 택했다. 이응의 조부의 손에 쥐어진 나뭇잎 꽃을 보려 이응이 자신의 조부의 팔뚝에 손을 살포시 올리면, 이응의 조부는 무해한 웃음을 띈 얼굴로 이응이 잘 볼 수 있도록 손목을 틀어 이응에게 보여주시곤 하셨다. 그리곤 곧 쥐고 있던 손을 위로 높이 들어 펴며 잎을 날려 이응의 위로 나뭇잎 비를 내려주셨다. 눈을 바르르 떨며 팔짝거리던 이응 역시 조부를 따라 나뭇잎 비를 내리려 꼼지락 손을 펴며 위로 나뭇잎들을 날리면, 이응의 나뭇잎 비는 얼마 안 가 금세 땅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그래도 이응은 그게 그렇게도 신이 나 매번 병점역으로 기차 구경을 가자고 자신의 조부를 졸라댔었다.


    이응의 부모는 이응이 말을 채 알아듣기도 전에 이응을 조부모에게 맡겼다. 이응의 조부모는 이응을 아주 예뻐라 하셨던 분들이었기에 이응의 부모는 매번 마음을 놓으며 이응을 그들에게 맡긴 것이었으리라.

    이응의 조부모는 이응을 아주 예뻐해 주셨다. 세 돌이 될 때까지 이응이 그들의 품에서 컸다는 사실만으로 이응은 별다른 장황한 설명 없이도 뜨문뜨문 기억도 잘 안 나는 그때를 참 따뜻했다고 느낄 수 있었다.

    이응에겐 그들의 품 안에서 자라며 얻은 몇 가지 좋은 기억들이 있다. 매 새해가 밝으면 이응의 조부는 이응의 앞에서 양손을 굴리며 “한 배, 두 배, 세 배! 세뱃돈 주세요!” 해보라시며 이응을 한없이 따듯하고 짓궂게 바라봐 주셨다. 이응이 조부가 보여주신 행동을 곧잘 따라하며 “한 배, 두 배, 세 배! 세뱃돈 주세요!” 말을 하면 그는 더 환하게 웃으시며 세뱃돈을 이응의 손에 쥐어주셨다. 어느 요일 매 저녁, 밥을 다 먹고 이부자리를 펴고 앉아 <가족오락관>을 보다가 테크노 음악이 나올 때면 이응의 조부는 어김없이 이응을 부르셨다. 조부가 자신의 코 앞에 손날을 세워 그 너머로 고개를 도리도리 살짝살짝 흔드시면, 이응은 애정 어린 조부의 눈빛을 받아 그를 따라 손날을 얼굴 앞에 두고 머리와 온몸을 좌우로 열심히 흔들었다. 그럼 “잘한다. 잘한다.” 박수를 치며 리듬을 맞춰 주시던 이응의 조부와 조모는 이응의 열정적인 춤사위에 깔깔깔 자지러지게 웃으며 뒤로 넘어가곤 하셨다. 그밖에도 조부가 멀리 일을 다녀오시며 선물이라고 사 오셨던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나 탄성을 잃고 허불렁한 고리를 하고 있는- 미키마우스 핸드폰 고리도, 찬장을 드르륵 하고 열면 있었던 위 아래가 끈적하게 서로 붙어 있던 유리 테이프들도, 안방 전화기 위에 붙어있던 방향제 스티커도, 이부자리 맡에 있던 요강도, 거실창 너머로 보이던 큰 나무도, 조부를 따라 오물오물 씹던 민트 잎도, 모두 이응에게 좋은 기억들로 남아 이응의 마음 한편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이응은 잘 알았다. 아니, 이응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응 자신의 조부모가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자신의 조부모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타 ‘보통의 조부모-손녀’의 관계가 아닌 그들과 좀 더 애틋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 그게 바로 자신, 이응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과 믿음에 약간의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이응은 한참 뒤, 그날이 되어서야 놀랄 틈도 없이 조용히 와르르 무너지는 마음으로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내 아빠가 아니지, 참?’

이응은 이응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조부를 자신의 부와 비슷한 무언가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떠한 대단한 사건 때문에 이응에게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조부의 입을 통해 나오던 문장들 중 하나가 이응의 마음을 가볍게 툭 건드리고 지나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 나도 너 아주 마않이 사랑한다.”

    이응의 조부는 수화기 너머 자신의 막내딸에게 세상 다정하게 인사를 하셨다. 그 특별하지 않을 수 있었던 말이 그날의 이응에겐 그렇게 특별하게 들렸다. 그 말을 옆에서 듣는데 이유 모를 서운함 한 방울이 이응의 마음 저 깊은 곳에 톡 떨어졌다. 그리곤 불현듯 알아차렸다.

    ‘왜 서운한 거지? 왜 저 인사에 내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거지? 나는 할아버지의 자식도 아닌데….아, 그래. 할아버지는 내 아빠가 아니지, 참?’

    이응은 찰나에 자신이 느낀 서운함에 신선한 충격을 느끼며, 지금껏 이응 자신이 자신의 조부와 조모를 자신의 부와 모 비슷한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여겨왔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집에서 이응의 모와 부가 이응의 동생의 모와 부여도 괜찮다고, 자신에겐 조모와 조부가 있다고 그렇게 여기고 지내왔음을 알아차렸다. 이응에게 이응의 조모와 이응의 조부는 단순한 보통의 조부모가 아니었다. 이응에게 이응의 조부모는 부모와 조부모 사이 그 어딘가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마치 이응이 이응의 부모에게 부모와 자식 사이 그 무언가에 가까웠던 것처럼 말이다. 이응은 그 사실을 깨달은 그때 처음 광막한 우주 한가운데 철저히 혼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치, 할머니도 내 엄마가 아니지, 참….’

    이응의 조모와 이응의 조부는 어렸던 이응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부모 대신 주신 분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응의 부모인 것은 아니었다. 이응은  사실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이응은 과연 자신이  사실을 이렇게 늦게 깨닫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부모와 자식 사이  무언가 살지 않아도 됐을까 생각했다.

이전 03화 이응의 우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