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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영 May 17. 2022

이응의 우주

8. 부분 우주

하루 종일 우울에 젖어있던 몸에 물을 끼얹고 나오던 참이었다. 발수건에 발을 슥슥 닦다가 울컥, 이응은 이응의 모에게 처절하게 묻고 싶은 욕구가 턱끝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엄마, 사실 엄마는 내가 한심하지. 사실 엄마도 내가 한심하지.’

이응은 자신의 모에게 그렇게 묻고 싶었다. 사실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자신의 부가 한때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이내 이응은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에게 고쳐 물었다.

‘엄마가 그렇다고 하면? 내가 한심하다고 하면? 혹은 아니라고 하면? 한심하지 않다고 하면? 나는 그 말이 어떤 말이든 믿을 수 있을까?’

이응은 그 어떤 대답으로 돌아올 말도 믿을 자신이 없는 질문을 자신의 모에게 하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실은 스스로가 스스로의 한 부분을 한심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도 새롭지 않게 깨달았다. 스스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차마 자신의 입으로 자신에게 쏘아붙이지는 못하고 밖으로 돌려 물으려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응은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 홀로 프랑스로 보내졌다. 그때는 그 사실이 서른이 가까워 온 지금 새삼스레 느끼는 것처럼 그다지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누가 어쩌다 이 프랑스라는 나라로 유학을 나오게 되었냐고 물으면 이응은 그 이유를 들어 부와 모 이야기를 했다.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던 두 분은 자신의 딸이 한국 대학에 진학하길 바라지 않으셨다고.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면 학비를 대주지 않겠다고 하셔서 나오게 되었다고.

프랑스에 보내진 스무 살의 이응에게는 프랑스로 건너온 동갑의 친구가 하나 있었다. 나이가 같다는 것 빼고는 취향, 식성, 성격, 무드가 전혀 다른 친구였다. 그 친구는 그 시절 늘 자신의 언니가 한심하다고 했다. 나이 서른 줄에 들어 아직도 유학을 마치지 못하고 부모님께 돈을 받아 산다고, 그 정도면 밥벌이는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자신은 이해를 할 수가 없다고 줄곧 말을 했다.

같은 시절 이응에겐 굉장히 친하진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마음을 써주던 서른 중반의 언니가 있었다. 한국 교회에서 만난 언니였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프랑스에서 심리학 공부를 하려 한다는 말을 들은 이후 그 언니는 이응을 굉장히 특별하게 생각해 주었다. 당신도 한국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고. 자신도 역시 프랑스에서 심리학 석사 공부를 하길 원한다고. 그 언니는 매번 이응의 어림을 퍽 부러워했다. 어려서 좋겠다. 나는 나이가 있어서…. 그 ‘나이가 있어서’ 뒤에 어떤 특별한 말들이 이어 붙지는 않았지만 이응은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스스로의 입을 통해 밖으로 뱉을 때마다 떨렸던 두 눈과 두 손에 그 사실이 언니를 불안케 한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알았음에도 이응은 불국 땅에서 이유 없이 마구 불안에 떨 때면 언니가 했던 ‘이응 씨는 어리잖아요’하는 말을 잠시 빌려 자신을 안정시키는 데 사용하곤 했었다. (그래서 벌을 받나 싶다.)


이응은 가만히 숨을 쉬다 문득 두 기억이 속 말들이 당시 스스로에게도 특별하게 들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이응은 리옹에서 맞았던 바람과 비슷한 바람이 자신을 쓸고 가는 노천카페에서 마주 앉은 비읍 너머 스텔라 맥주병을 보며 말했다.

“사실은 타임머신을 타지 않고도 사람은 알 수가 있어. 절대 지워지지 않는 사소한 기억으로 말야. 그 두 사람이, 그 두 사람에 얽힌 말이 사실은 내 이야기이기도 했던 거야. 그래서 일종의 암시를 받은 듯 내 안에 남아 있는 거지.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게 내 이야기가 되어가. 내가 다시 유학을 나가면, 응, 혹은 내가 다시 심리학 공부를 시작하면, 그건 이제 더 이상 그 언니들의 이야기만이 아닌 거지.”

비읍은 오묘한 꽃향이 나는 콜드 브루 샘플 잔을 호록 마시곤 이응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 뭘 가장 하고 싶어?”

이응은 눈을 꿈뻑였다. 그리곤 비읍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대답을 했다.

“나는 그 질문이 이제 지겨워.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야?’ 몰라. 나도 몰라.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거 다 해봐도 나는 모르겠어. 이건 이래서 무섭고, 저건 저래서 두려워. 얜 이래서 아니고, 쟨 저래서 아니야. 몰라 모르겠어.”

“너는 대체 뭐가 두려운 거야. 이 순간 너를 가장 망설이게 하는 건 뭐야. 가령, 리을은 그런 부담이 있잖아. 좋은 직장을 들어가야 한다는 그런 부담? 너는 뭐야?”

“나? 그건, 나 그건 명백하게 알아. 나는 다시 머리 박는 게 무서운 거야. 오래 생각을 해봤다? 도대체 내가 뭐가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지. 근데 너무나 명백하게 나는 머리를 박는 게 아픈 걸 너무 잘 알아서, 이젠 정말 머리를 박을 때가 왔는데 그게 얼마나 아픈지, 나에게 과거 어떤 상처를 내 왔는지 아니까 그게 두려운 거야. 알아. 이건 사실 간단해. 그냥 한 번 박으면 해결되는 일이야. 근데 그 머리 박는 게 무서워서 못하고 있는 거야. 그게 뭐든. 리을의 말대로 마음을 먹으면 되는데 마음을 못 먹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냥 밖에다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이야기를 해. 응.”

비읍은 별다른 말없이 이응의 다음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너도 물론 그렇지만, 그랬지만, 나는, 나는 계속 머리 박는 삶을 살아왔어. 근데 그게 나는 너무 아팠어. 뭐든 혼자 해야 했고, 혼자 박아야 했고, 그러다 다치면 혼자 그걸 수습을 해야 했어. 그게 한국이든, 프랑스든. 뭐든 처음, 첫 번째, 낯선 곳, 낯선 사람, 낯선 사회. 나는 계속 그런 곳에서 매번 머리를 박으면서 그게 뭐든, 그 모든 걸 해결해오며 살아왔어. 그러다 뭐, 못 해 먹겠었던 거지. 그거 다 포기하고 돌아와서 두 손을 다 놔버렸었는데. 이젠 살아보겠다고 했으니까. 머리 박아야 하니까. 그래서, 그게 무서운 거야 나는.”


“근데, 이젠 아니잖아. 근데 이젠 다시 밖에 나가지 않는 이상, 너 옆에는 내가 있잖아. 너한테는 내가 있고, 리을이 있고, 시옷이 있고, 너희 엄마, 너희 아빠, 동생까지 있잖아. 그렇더라. 나도 제주에 있을 때, 그런 날들이 있었어. 이상하게 너도 리을도 남자 친구도 엄마도 아빠도 재재도 연락이 안 될 때, 그때 돌아버리겠는 거야. 그때 난 알았어. 이 사람들이 나에겐 너무나 중요하구나. 이 사람들이 나를 이루고 있구나. 있잖아. 너가 머리를 박고 무너져, 상처가 나, 그래도 너를 이루고 있는 다른 우주가 무너지지 않으면 너라는 우주는 무너지지 않아. 이건 자명해.”

비읍의 단단한 말에 이응은 새로운 눈이 떠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결국 이응이 홀로 했던, 혹은 이응의 모와 이응의 부와 이응의 동생과 몇 년에 걸쳐했던 싸움은 스스로의 부분이 되는, 스스로를 지탱하는 다른 우주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지탱하는 부분 우주가 건재함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이응은 생각했다.

이응은 이응의 부가 나고 자랐다는 동네 대흥동에서 스스로를 이루는 부분 우주를 생각하다가 맹숭맹숭한 짜이 티에 양 입꼬리를 한껏 내리고 코평수를 넓혔다. 그러다 이내 얼굴에 힘을 풀곤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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