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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유리 Mar 25. 2021

장례식은 사랑을 싣고

우리 엄마 장례식에서 만나 썸을 탄 내 친구들. 그리고 나

  우리 엄마 장례식에 왔던 내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이렇게 평균연령이 어린 장례식장은 처음이야.”     


  남동생은 24살, 나는 25살이었고 미국인과 결혼한 엄마에게는 딱히 시댁이랄 것도 없었기 때문에 장례식장에는 나와 내 동생의 손님, 그야말로 어린 애들 뿐이었다. 그렇게 20대 청춘남녀가 3일 밤을 지새우고 있으니 ‘장례식장에서 이런 일도 생길수가 있구나.’ 싶은 일이 많이도 있었다.      


  4년 전인가 내 친구 주희(가명)와 민수(가명)를 연결해준 적이 있다. 당시에 주희는 1년 넘게 만나던 남자친구가 있었고, 전공이 같아서 물어볼 것이 있다 길래 그냥 편하게 만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정말로 그냥 ‘편하게’ 만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다. 그 날 나는 혼자 집에 와서 잤고 그 둘은 같이 잤다. 그렇게 주희와 민수는 뜨거운 연애를 시작했고 몇 달 못 가 둘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남처럼 지내다가 엄마 장례식장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장례식장에서 민수가 나에게 한 행동이 의아하긴 하다. 아무리 엄마 잃은 친구를 위로하는 거라지만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 어깨를 끌어안는 것이 영 오버스러웠다. 당시에는 그런 것 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주희(민수의 전여자친구이자 내 친구)가 심히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 날 새벽 주희는 장례식장에 널려있는 소주를 두 병 정도 마시고는 술에 잔뜩 취해 상복은 입을 날 붙잡고 민수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사실 자기는 아직 민수를 잊지 못했으며 자기의 마지막 사랑은 민수라는 고백과 함께...     


  하지만 민수는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친구 소희(가명)와 눈이 맞아 있었다. 엄마가 병원에 있을 때부터 나와 같이 밤을 새 주던 친구들이 몇 명 있었는데, 밤 새 병실을 왔다갔다 하는 나를 기다리며 소희와 민수가 친해지게 된 것이다. 장례식이 끝나고 그 둘이 따로 연락을 하며 일명 ‘썸’을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정말이지 너무 너무.. 기분이 나빴다. 

  아니, 장례식은 나를 위로하는 자리가 아닌가? 어떻게 그런 장소에서 그런 마음이 생길수가 있지? 민수는 미친건가? 어떻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내 친구를 만날 생각을 할까? 뭐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이 상황이 무척 우스워졌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고 내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이 장례식이 7월에 있는 두 번째, 세 번째 장례식이었을 테고, 누군가에게는 나의 슬픔이 ‘아이고, 참 딱하다.’하고 돌아서면 까먹을 수 있는 정도의 슬픔이었을 테다. 나도 누군가의 장례식에 다녀와서 몇 년이고 두고두고 슬퍼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자기네 엄마 장례식도 아니고 남의 엄마 장례식장에서 당사자만큼 슬퍼해주길 바라는 것도 이기적인 행동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불편하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역시 모든 일에는 적당한 무게가 있는 법이다. 그 무게만큼만 생각하고 그 무게만큼만 담아두면 된다. 더 가벼워도 좋고.     


  ‘그래, 병원에서부터 밤 새 내 옆 자리를 지켜준 내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만 가지자!’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내 마음을 채웠다. ‘인연이라는게 언제 어떻게 만날지 모르는 것이니 그 둘이 정말 사랑한다면 응원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민수에게 전화가 왔다. 소희랑 여차저차 해서 잘 안됐단다. 

  아~ 분명 둘을 응원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어딘가 묘하게 안심이 되는 것도 같고.. ㅋㅋ 아무튼 그 일은 그렇게 장례식은 사랑을 싣고 ‘왔었다.’로 마무리 되었다. 나의 시간은 슬픔으로 들어차있었지만 다른 이들의 시간은 평범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또 같은 공간에 있다 해도 누구의 시간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기도 했던 것이다. 아, 세상은 역시 그럴 수도 있는 거였다.      


  장례식 셋째 날, 아침 일찍 발인을 마치고 리무진에 엄마의 관을 실었다. 산 밑에까지는 어찌저찌 차로 올라간다 쳐도 장지까지는 관을 들고 올라가야 한다. 보통은 나이도 경험도 많은 아저씨들이 운구를 하는데 우리는 운구를 할 사람이 없었다. 남동생 친구들에게 부탁을 하자니 너무 어린 애들에게 험한 일을 부탁하는 것 같아 미안했는데 선뜻 하겠다고 해주어서 남동생의 고등학교 친구들 여섯 명이 운구를 하게 되었다. 복수가 차서 마지막에는 몸무게가 거의 10kg가 불었던 엄마를 들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그런 엄마를 들고 가파른 산길을 가준 그 애들에게 평생 고마울 것이다.

  매장을 마치고 내려왔는데 사람은 많고 차는 한정적이어서 동생 친구가 운전하는 차에 끼어 타게 됐다. 조수석에 앉아 운전을 하는 그 애의 옆모습을 보는데 뭔가 뭉클하니 고맙기도 하고 까슬한 수염이 귀엽기도 해서 ‘경호야, 누나한테 장가올래?’하고 장난 섞인 말을 건넸다.      


  몇 달 뒤, 우리 엄마 관을 들어준 남동생의 친구와 정식으로 만나게 되었다. 어쩌면 이미 눈은 그 때 맞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아직도 이 상황이 우습긴 한데 아무튼 그렇게 됐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미리 알려 줄 필요 없이 우리 엄마 산소에 함께 갈 수 있고, 브런치에 적을 글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그런 사람과 하는 연애는 참 신기하기도 신기하고 또 행복하기도 참 행복하다.      


  2020년 7월, 그 여름날의 장례식장에서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각자의 시간은 각자의 삶에서 흘렀으며 장례식은 이별을 싣고, 눈물을 싣고 또 사랑을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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