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시장인지라 소비시장도 까다롭고, 환경적 변수로 인해 생산마저 불확실한데, 노동시장은 점점 경직되어 간다. 고용해야 하는 친인척들은 점차 나이 들어가는 상황에, 외국인 근로자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다. 이유는 코로나로 인한 봉쇄의 여파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 굴의 채산성 문제이다. 수출 시장에 대한 국가의 무역 전략, 내수 시장에 대한 국가 보조, 그리고 국가가 보급하는 양식기술혁신에 큰 영향을 받게 되는 수산물 시장에서 굴은 80년대 전성기를 찍고, 꾸준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현재 전라남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양식장은 김이다. 굴지의 대한민국 수산물 수출 1위 품목이다. 한 때는 굴이 차지했던 자리다. 그러다 보니 외국인근로자들도 같은 시간을 들여 김 양식장에서 일하지 굴 양식장에서 일하진 않는다. 참조로 오취마을에 연승수하식 굴양식이 도입된 것도 새마을운동 덕택이었다.
근로기준법에 대한 불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예전에는 외국인근로자도 유연하게 고용할 수 있었고, 그 비용도 지금보다 훨씬 낮게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외국인근로자들을 중개해 주는 인력사무소에서부터 근로기준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굴수산업자들은 재량을 부릴 여지가 거의 없다. 분명 지켜나가고 있는 나랏법이지만 이곳에서 벌어지는 굴양식업의 현실과는 여러모로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양식업을 유지하기 위해선 마을의 친지 여성어르신들의 ‘삯일’에 의존해야 하는 꼴이지 않은가. 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주 52시간 근무 제한이나 주말근무에 대한 1.5배 보상 따위 등은 이곳에서 무의미하다.
그러니 섬마을의 굴막은 마치 ‘유령’ 같이 보이지 않는 여성의 노고에 근간하고 있다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겠다. 1700년대에 정착한 후 격동하는 근현대사를 숨죽여 지내오는 장구한 시간, 섬마을의 여성은 항상 그런 위치에 있었다. 과거, 여성은 어선에 탈 수 없었고, 가정의 대소사는 남성들, 특히 부모의 기대 아래 장남을 중심으로 주도됐다. 여성들은 가족의 이름이란 그늘 아래에서 보이지도 않은 역할을 숙명처럼 감내하며 한평생을 살아왔다.
박신작업을 하고 있는 오취마을 여성 어르신
누군가 스무 살이 갓 넘겼을 때, 부모의 점지를 따라 한 남자의 아내로 잘 모르는 섬에 발을 디뎠다. 가난한 시기, 남편은 형제, 친지들과 함께 열심히 밥벌이를 해 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한 채, 그저 모두가 그랬던 대로 조용히 내조해갈뿐이었다. 하지만 내조는 단지 집 안의 일들을 뜻하는 게 아니다. 가사 일을 하고, 자녀를 기르는 건 물론, 논밭을 경작해야 했고, 남편이 낚아온 어물을 시장에 내다 팔거나, 때론 가게, 식당에 취업해 일을 해야 하기도 했다. 굴 껍데기를 까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어쩐지 남편은 형에 비해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 같다. 집안 일로 싸우게 돼도 매번 져서 온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련히 집 안사람들 간 이야기일 뿐, 그냥 불만만 삭힐 수밖에 없다. 그러다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야 갑작스럽게 깨닫는다. 유산이란 게 발화점이 될 수도 있겠다. 분명히 남편이란 사람은 형제들과 함께 가업도, 마을일도 열심히 했는데, 남긴 건 쥐뿔도 없고, 왜 이렇게 빚은 많은 건지. 시부모님, 형님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한평생이 한(恨)스럽다.
그래도 장성한 자녀들이 남았고, 번듯한 일가도 꾸렸다. 젊은 날 지지고 볶던 친지 어른들도 이젠 그저 같이 늙어가는 처지다. 나이를 먹어가며 싸울 만큼 싸웠다. 무엇보다 애초에 싸워야 할 사람이 돌아가셨거나, 살아계셔도 이젠 양 쪽 모두 힘이 없다. 사근사근하게 대할 수야 없겠지만 이제 서로 할 말도 다 하고, 사과도 하면서,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살아간다. 독립한 자녀들의 얘기로 정말 끊임없이 돌아가던 여성어르신들의 인터뷰를 어떻게든 헤쳐 나가며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들이다.
여성어르신과의 인터뷰, 끊임없이 자녀들 얘기로 돌아가셨다.
“여기 어르신들은 굴 철에 열심히 돈을 모아, 굴 철이 끝나면 병원에 갖다 바친다.”
언젠가 이장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다. 노련하게 일을 해나간다고 하더라도, 몸에 가해지는 부담은 어찌할 수가 없다. 쓸데없는 편견이 생길까 봐 노파심에 말하자면, 이곳에 살고 계신 여성어르신들은 전반적으로 서울에서 봤던 노인보다 훨씬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 계신 것 같다. 이곳에서 정말 많은 집을 방문했었는데, 관리가 안 된 집을 거의 보지 못했다. 하도 일하면서 살아오셔서 그런지 부지런함이 몸에 배여 계시고, 심신 모두 정돈된 삶을 꾸려 가신다. 한 번은 청년예술가가 어르신에게 사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냐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사는 건 사는 거지, 뭐가 있느냐”는 우문현답을 해주시기도 하셨다.
하지만 70세가 넘으신 어르신들의 건강 상태는 경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한평생 쪼그려 앉아 일하시니 허리, 무릎은 상할 대로 상해 꼬부랑 할머니가 되셨고, 한평생 그 작은 굴을 움켜쥐고 조새로 껍질을 깨셨으니 손가락 열 개의 마지막 관절이 다 비틀려 있다. 그 주름지고 거친 손을 볼 때마다 어르신께서 견뎌온 삶의 무게에 숙연해지곤 했다. 이즈음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굴막에 나가는 일을 그만 두시지만, 꾸부정한 걸음으로 보행기를 끌면서까지 굴막에 나가시는 분들도 여전히 계신다. 먹먹한 뒷모습이다. 그분들은 왜 이렇게까지 일을 하실까. 아마 한평생 살아온 방식이라, 다르게 사는 방법을 모르시는 건 아니실까.
봄이 완연해지면 굴막도 잠들 채비를 갖춘다. 하루하루, 초를 재가며 숨 가쁘게 달려온 박신 작업과는 달리 한결 여유로운 걸음으로 쉼과 잔일이 조화롭게 반복되는 시기이다. 잔일이라 하지만, 수고로운 건 어업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어업에 수반되는 잔일은 ‘식구미’라고도 불린다. 남성어르신들은 이주에서 삼주에 거쳐 마을 광장에 장작을 늘여놓고 매일 아침, 저녁마다 도끼로 팬다. 그 양이 장난이 아니라, 나도 군대 경험을 살려 한 손 거들었는데, 나이도 많으신 어르신들이 왜 이리 도끼질을 잘하시는 건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힘 하나도 안 들이고 장작을 한 번에 쩍쩍 패신다. 다음 겨울철, 굴막에 땔 장작을 벌써부터 준비하시는 거다.
하지만 무엇보다 여성어르신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수산업자들이 베트남산 가리비 껍데기를 공수해 오면 짧은 고무줄을 사용해 가리비껍데기를 20m 줄에 일정 간격으로 매단다. 단세포생물처럼 생긴 굴유생을 여러 껍질에 착상시켜 굴 종묘로 만드는 작업을 ‘채묘’라고 하는데, 이 ‘채묘기’를 ‘수하연’에다가 매다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채묘기 묶음들이 한 해 동안 통영으로, 벌교로 나갔다, 다시 오취 앞바다로 돌아오게 된다. 마을 여기저기, 그늘진 곳에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가리비 껍데기를 꿰기 시작하시는데, 장작만큼이나 양이 어마어마하다. 한 다발에 수하연이 200개가 있는데, 수하연 한 개당 가리비 껍데기를 16개씩 꿰어야 하고, 그런 걸 수십 다발해야 하니, 얼마나 많은 노고가 들어가는지 상상이 안 간다.
수하연에 채묘기를 묶는 작업이다. 얼마나 많은 노고가 들어갈 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한 번 서너 시간 정도 함께 둘러앉아 껍질을 꿴 적이 있었다. 한 다발을 꿰려면 네다섯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역시 이 일도 삯일이다. 한 다발 당 삼만 원 정도이다. 어르신들에게 여쭤보니, 이 작업을 하루 종일 할 순 없으니, 일당으로 치면 만 원 정도가 수중에 떨어진다고 하신다. 어르신마다 돈은 안 되는 일이라며 볼멘소리를 덧붙이셨지만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설렁설렁은 아니시다. 돈도 안 되는데 왜 하시느냐 물어보니, 마치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할 법한 답변이 돌아왔다.
“돈은 안되지만, 겨울에 굴 까게 해 준 곳이고, 이걸 해야 또 한 해를 보낼 수 있으니깐.”
전처리들이 꽤 잘되어 있어서 꿰는 것 자체는 손쉽게 할 수 있었지만, 지독한 단순노동이었다. 멍하니 푸른 하늘과 바다를 보면서 사색에 잠기기 딱 좋았다. 나야 한 번이지만, 이걸 몇 주 간 하시는 어르신들은 무슨 생각을 하실까 싶었다. 아직 상상은 안된다. 반대로 오히려 생각을 비우시진 않으셨을까 싶기도 하다. 그녀들은 씨앗을 뿌려야 할 때 뿌리고, 수확해야 할 때 수확한다. 무엇과 비교하는 것 없이 묵묵히 지금 이 자리가 자신의 자리고, 그 자리에서 해야 할 것을 하며 그저 늙어갈 뿐이다. 사는 건 그냥 사는 거라는 말씀이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