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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의 최대행사, 어버이날

by 버들 Dec 06. 2024

(12화 굴 한 다라이=수학여행비 전편에서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오취마을에서 가족은 ‘규범’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어느 사회든 도덕률이 없고, 구성원 간 도덕적 연대가 없으면, 개인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열망의 노예가 되고 만다. 한때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이런 열망들을 올바른 도덕률로 인도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는 결코 방임에서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인류 역사상 그렇게 둔 적도 없을뿐더러, 올바른 도덕심과 규제가 있어야만 개인은 ‘아노미’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      


 수많은 개인들이 모여, 의사소통만으로 어떤 일관된 도덕률을 만들어 낼 거라 기대하긴 어렵다. 그래서 규범은 일상적으로 행사되게끔 제도로 발전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 형태이다. ‘의례’와 ‘금기’다. ‘종교’와 ‘법률’이다. 그리고 이 제도들은 연성화(soft) 되면서 ‘행사’, ‘교육체계’, ‘통제기제’ 등 다양한 형태로 희석되고 변모한다. 사람들이 합의를 통해 규범을 만든다고 한다면, 합의는 ‘강압’으로도, ‘거래’로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섬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라 해도 무방한 어버이날 행사 전경섬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라 해도 무방한 어버이날 행사 전경


 그래서 어버이날은 매우 중요한 마을행사다. 가히 섬마을 최대 규모의 행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5월 8일, 마을임원들은 마을회관 앞마당에 대형 캐노피천막을 펼치고, 접이식 야외테이블을 설치한다. 출장뷔페를 불러 음식을 일렬로 깔고, 고기도, 술도 넉넉히 준비한다. 특히 노래방설비는 필수다. 이렇게 성대한 식사대접은 사실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 오랜만에 어르신들이 한데 어울려 가무를 즐기는 것이야말로 이 행사의 메인 메뉴다. 이 날은 청년회도 총출동해 마을 어른들을 열심히 대접한다.      


 이장의 진행 아래 마을사람 앞에서 어촌계장, 부녀회장, 청년회장 등 마을임원들이 포부를 밝히는 자리가 되기도 하고, 노인회장이 넌지시 덕담을 전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여력이 있는 마을사람들은 앞 다투어 부조를 한다. 부조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부조 봉투에 이름을 적어, 보란 듯이 줄에 걸거나, 행사 중에 부조자 명단을 발표하는 식이다. 말하자면 그날은 마을 구성원 모두 모여 우리 마을을 기리고, 다 함께 살아가보자고 결의하는 날이 되겠다. 그리고 그 원리의 근간이 되는 규범이 바로 남녀노소 모두, 시대를 넘어 동의하고 있는 ‘효(孝)’다. 면사무소, 군위원, 복지관, 수협 등 지역 유수의 기관도 이 날 마을을 돌아야 한다. 어버이날을 소홀히 하면서 표심을 다지고, 고객충성도를 관리하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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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부조는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우) 지역기관은 이 날 관행적으로 마을들을 순회한다.

 

 더하여, 음향업체의 활약도 주목해 볼 만하다. 이 시기, 행사는 고흥 전역에서 우후죽순으로 일어나는데, 이들이 행사에 필요한 비용을 혁신적으로 줄여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음향업체는 노래방 기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키보드 연주자 한 명을 섭외하고, 출장뷔페와 협력해 행사를 시작부터 끝까지 완성도 있게 주관한다. 심지어 무대 분위기를 띄우는 바람잡이 역할도 매우 훌륭히 해내, 살짝 과장하자면 주민임원들이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해도 될 정도다. 행사의 진행은 매우 심플하다. 그렇기에 주민임원들과 음향업체는 별도의 리허설 같은 걸 하지 않아도, 수월하게 역할을 분담하고 능숙하게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다. 노래하고 싶은 주민들이 무대 앞으로 나와 연주자에게 신청곡을 전달하면, 연주자는 노래방 기기에 맞춰 키보드를 맛깔나게 연주한다. 다른 주민들은 쭉 둘러앉아 관람한다.     


 연극, 공연, 버스킹, 축제, 전시... 서울에서 다양한 문화 행사들을 봐왔다. 마을 행사와 비교하면 프로그램화되고, 전문화되고, 분화되고, 고도화됐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생활문화의 역할이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다소 단순하고, 원초적인 마을 행사이지만, 바로 그래서 문화예술의 시원(始元)적인 기능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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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마을에서도 열린 어버이날 행사, 음향업체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어버이날 행사가 끝난 후 주민임원들은 뒤풀이를 하셨다. 읍내로 나가 얼큰하게 취하셨다. 나도, 동료도 술잔을 기울였다. 이대로 끝내긴 아쉬우셨던 건지 주민임원들께서 갑자기 노래방을 가자하셨고, 마침 읍내에 마땅한 곳이 없어 면소재지로 향하는 봉고에 올랐다. 노래방으로 가는 차 안에서 주민임원들은 청년회장님의 아버지를 떠올리셨다. 녹취록을 공개하고자 한다. 살짝 거칠었던 대화였지만, 깊은 결속감이 깔려 있다. 이 대화를 놓치고 싶지 않아 나는 취한 척, 자는 척하면서 몰래 갤럭시 워치의 녹화버튼을 눌렀다.        


이장 : 자, 이렇게 근데 이제 000네 아버지가 눈을 많이 깜빡깜빡해. 000네 아버지가, 이~ 눈을 깜빡깜빡하고 이렇게 있는 게 이 새끼들아 나 요거야 이제 그려.
 (일동 웃음)
청년회장 : 사생활, 사생활 침해하지 맙시다.
부녀회장 : 우리 00 청년회장님 부친께서, (웃음)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담배 맛나게 피운다 맛나게. 그분처럼 담배 맛나게 피운 사람이 없어(웃음).
청년회장 :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담배 끊었는디.
부녀회장 : 우리 남편, 돌아가신 남편이...

이장 : (청년회장에게) 이제 기억한다 이 말이여. 기억.

부녀회장 : 담배를 피우면은 어얼~마나~ 맛있게 피운 그대가 바로.
이장: 속으로 쑥~ 여가지고.
부녀회장 : 쑥 여가지고(웃음), 가슴으로 푸욱 내쉰단 말이야(웃음). 그래가지고 한참 있다가 푸~~욱 내쉰단 말이야.
청년회장 : (기분이 나쁜 듯) 아니. 우리 아버지가 그랬소?
부녀회장 : 으이.

청년회장 : 만원씩 내시오, 만원씩.

(일동 웃음)
이장 : 코로도 푸욱.
청년회장 : 공연 아니오, 공연?
부녀회장 :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 돌아가신 분네가,

청년회장 : 공연 관람하셨으면 만원씩 내야지라.

부녀회장 : 그 이야기를 해. 담배 맛나게 피운다. 만날 그런다. 000 형님 같이 맛나게 피운 거 내 처음 봤다. 어떻게 피웁디요 그랬더니, 따악 물어 댕겨갔고, 가슴에다 딱.
청년회장 : 그래갖고 우리 아버지가 폐암으로 안 돌아가셨붙쇼.
이장 : 그리고 하여튼 000네 아버지가 코도, 콧구멍도 엄청 커.
청년회장: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셨다고라. (일동 웃음) 담배를 그렇게 맛나게 피워갖고. 내가 왜 암 모르요.
부녀회장 : 그래갖고 인자 그냥
청년회장 : 그 가슴 아픈 이야기를 그렇게 해야 되겠소! (화나서) 폐암으로 돌아가셨다부랴!
부녀회장 : 아니, 그 가슴 아픈 이야기 아이고.
이장 : 아이 우리가 인자
청년회장 : 뭔 어떤 혜택도 못, 못 받고.
이장 : (성질을 내며) 이 새끼 참, 아니 그러면 누구는 혜택 받고 살았냐.

청년회장 : 아니 이 염병할, 저 어디 무슨 보험회사?

(일동 웃음)

이장 : 그러면 느그 아버지.

청년회장 : 아니 우리 아버지가 일 년에 보험을, 한 달에 이십 만원씩...      

이장 : 느그 아버지, 그 나이에 월남이나 좀 가라 그러지. 월남.

청년회장 : 에? 월남?

부녀회장 : (웃음)

청년회장 : 우리 할아버지가 태평양 전쟁을 가셨는데, 월남을 가라?
부녀회장 : 할아버지가 갔으면 저 그거,

이장 : 태평양 전쟁, 이제 그럼 그거 받았냐 그면. 할아버지.

청년회장 : 엥? 형님 그거 아직도 안 나왔어요. 해결 안 됐어요.
부녀회 총무 : 그거 누가 받아서 묵어 버렸다 했잖아.

청년회장 : 아니, 우리 동네 세 사람이었어요. 세 분, 세 분.

부녀회 총무 : 그랑께. 000이라고.

청년회장 : 그 000네 할아버지하고 우리 할아버지하고 딱 세 사람이에요.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 그 옛날에 그 목에 손수건 둘러 다닌 거 아시죠?

부녀회장 : 암, 알지, 알지.
청년회장 : 그게 총알 스쳐가지고, 가래 끓어서 그런 거잖아요.
부녀회장 : 에, 에, 에.
이장 : 우리가,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자네보다 훨씬 더 잘 아네.
청년회장 : 이게 태평양전쟁 때 그거잖아요. 태평양전쟁 그거,

이장 : 못받았나?

청년회장 : 아예 나오지도 않았어요.
부녀회장 : 어... 그렇구나.
청년회장 : 거기 유족회, 거기
부녀회 총무 : 나오도, 나오도 안 했다니까.
청년회장 : 돈도 내고 막 그랬는디...
이장 : 그러니 윤석열이도 여기 뭐라고 합디. 우리 기업에서, 기업에서 대법원의 판결한 우리 기업에서 보상해 주자, 우리나라에서 보상해주라 안 그럽디요. 이 시바 36년 동안 그 핍박을 받았는데...

(때마침 차는 노래방에 도착했고, 화제가 변함.)


주민들 앞에서 인사드리는 오취마을 마을임원진주민들 앞에서 인사드리는 오취마을 마을임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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