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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형국 Oct 18. 2024

8. 답답해 보이는 아이의 선택들

주체적인 삶

천상 남자아이인 첫째는 마치 추위를 견디는 것이 남자의 강함을 상징하는듯 옷을 춥게 입고 가기를 원한다. 심지어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한 요즘에도 얇은 옷 한장을 걸치고 양말도 안신고 나가려고 한다.

첫째 : 오늘은 이렇게만 입고 가도 될것 같아

엄마 : 안돼~

첫째 : 왜 안돼?

엄마 : 너무 추워. 밖에 추워서 감기걸릴것 같아.


천상 여자아이인 둘째는 한복을 참 좋아한다. 명절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한복을 입고 다니길 즐긴다. 양가 부모님과 함께 점심 식사를 약속한날 둘째는 또 다시 한복 타령이다.

둘째 : 엄마 오늘도 한복 입고 갈래~

엄마 : 안돼~

둘째 : 왜 안돼?

엄마 : 이상해.. 상황에 맞게 옷을 입어야지!


너무나 일상적인 대화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때와 장소에 맞지 않게 옷을 입는 아이가 걱정되는것은 당연하다.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면 부모에게는 모든것이 걱정이다. 아이의 행동이 어떤한 결과를 불러 일으키는지 눈에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아이에게 '그래! 한번해봐!' 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부모는 드물다. 그러나, 나는 이 '한번 해봐!' 라는 말을 통해 스스로 선택해서 본인의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여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는 망나니 아들(부모 입장에서)이 두명 나온다 첫번째는 싯다르타, 두번째는 싯다르타의 아들. 소년 싯다르타는 아버지의 극진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출가한다. 출가 당시 아버지의 고뇌를 보여주는 장면은 지금 다시 읽어도 마음이 찡할 정도로 가슴이 아프다. 싯다르타의 아들은 싯다르타가 최선을 다한 다정함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떠나버린다. 이 두명의 아들을 통해서 헤르만 헤세는(어쩌면 소설 전체를 통해서)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깨달음이 있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경험하고 개척하는 것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어리석은 선택일지라도."


라는 메세지를 남긴다.



첫째는 왜 저런 무리한 옷차림을 주장하는것일까?


'직접 겪어보지 않아서 그렇다.'


그러던 어느날 첫째가 태권도를 하원하면서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벗어버리고 이 가을날에 반팔 차림으로 하원한적이 있었다.(물론 맨발이었다) 아이의 마음속에는 추운 옷차림과 맨발 외출의 로망이 아직 남아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벌벌 떨면서 집으로 들어가는 아이를 지켜볼뿐.


첫째는 그날로 양말과 긴팔 긴바지를 철저하게 입고 다닌다.(추위에 호되게 혼났는지 가을에 패딩을 입고 가겠다고 한적도 있다.) 스스로 사유하고 스스로 판단해서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적인 삶을 만든것이다.



주체적인 결정의 장점은 둘째의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둘째는 결국 한복을 입고 약속에 나갔고 양가 부모님들은 굉장히 좋아하셨다. 또한 모임 장소 역시 한옥으로 꾸며진 장소임에 어찌 그렇게 찰떡인지 모른다.

찰떡

둘째의 사례는 둘째가 자신만의 선택을 하여서, 남들과 같은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경우가 된 것이다.


권영민의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 '아이야, 누군가가 정해놓은 규칙의 노예가 되지 말고 창제자가 되어라. 규범을 깨고 권위를 비웃어라. 아빠가 아직은 좁지만 기꺼이 그 공간이 되어주마.' 라는 문구가, 김종원의 아이를 위한 루 한줄 인문학에서 '창조자가 되어라. 길을 개척하라' 라는 문구가 생각나는 사례였다.



버지니아 사티어의 아이는 무엇으로 자라는가에서 작가는 부모들이 자녀의 적성이나 희망과는 무관하게 특정한 꿈을 이뤄주길 기대한다 라며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자녀에게 보이지 않는 구속복을 입히는것"이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이제 우리는 아이의 주체적이고 고유한 삶을 인정하자. 부모가 보기에 답답하고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그 선택이 어떠한 행복을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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