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일 년에 두어 번 달과 태양 사이에 놓인다. 그때 달은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져 붉게 상기되고, 잠시간 제빛을 잃는다.
나는 그것을 목격했을 때 왜인지 애달파졌다. 별안간 입술 위로 스친 미묘한 감촉 때문이었던가. 그 뒤에 따라붙은 기억 때문이었던가.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때 그리움 비슷한 감정이 자꾸 상기됐던 것 같다. 며칠간 흐릿한 장면을 쫓아 동네를 돌아다녔던 걸 고려해보면 그건 정말 그리움일지도 몰랐다.
사방이 캄캄했던 논길과 드문드문 놓였던 가로등과 눈물에 젖어있던 입술, 아니 사실은 여태껏 나열한 것들을 뒤로하고, 선연하게 떠올릴 수 있는 미묘한 감촉만으로도 나는 그 기억을 묘사할 수 있다. 그 기억 덕분에 무너지려다가도 다시 견뎌낸 일들이 제법 되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날을 떠올리면 나를 시달리게 만들던 걱정들이 무안해질 정도로 덤덤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가끔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무력감이 집요하게 따라붙는 바람에 그날의 나를 자책하면서 돌아간다면, 하고 중얼거리거나 기회가 생긴다면, 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거듭한 날도 몇 있었다. 누가 보면 궁상떤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내 주위를 위성처럼 돌았다. 두 다리는 부지런하게, 시선은 나에게 꼿꼿이 고정한 채였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모종의 결심 때문에 벽을 쌓고 있었고, 상당 부분 모난 심경으로 지내던 와중이라 그랬는지 구석구석을 숨겼다. 의도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처 낼 수 있는 상태였던 거지. 게다가 그때는 마음에 둔 사람에게서 무관심을 받고, 모진 말을 듣는 일이 얼마나 아픈 일인지, 사람을 얼마나 깊이 묻을 수 있는지를 몰랐다. 고백하자면 그날, 내가 애달프다고 여기는 그날에, 나는 그 사람에게 좀 모질게 굴었다. 그 사람, 얼마간 제빛을 잃었겠지. 어쩌면 그 얼마간이 이제껏 산 날보다 길게 느껴져서 내 이름은 그 사람에게 잊고 싶은 이름이 되었을지도 몰랐다.(그게 아니라면 나는 인생의 기회를 얻은 것처럼 기뻐하겠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생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지구의 바다에서는 달과 태양의 힘으로 유발된 밀물과 썰물이 교차한다. 하루에 두 번씩 물이 찼다가 빠졌다가 하는 그 일을 이 행성은 보란 듯이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다가 기억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인지 지구와 달의 모양새가 낯설지 않단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