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인가, 정당한 컴플레인인가-
‘진상’이라는 단어는 쉽게 꺼내기 어려운 말입니다.
누군가를 진상이라 부르는 건 늘 부담스럽고,
‘내가 예민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도 하죠.
하지만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누가 봐도 이상한데, 이상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을 마주하게 됩니다.
감정을 휘두르고, 업무를 방해하며, 병동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존재들.
특히 신규 간호사 선생님들에겐 이런 상황이 정말 힘겹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들의 말에 모든 걸 예스라고 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단호함과 융통성 사이에서 지킬 건 지켜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간호사는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유연함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모든 요구를 다 수용하면, 결국 다음 근무자에게 피해가 갑니다.
“다른 간호사 선생님은 해줬는데요?”
“어제는 됐는데 왜 오늘은 안 되나요?”
이 말 한마디에 분위기는 금세 불편해지고,
업무의 기준은 무너지고, 팀워크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도움을 주더라도 ‘합의된 한계’를 명확히 설정하는 것입니다.
“이번 한 번은 도와드릴 수 있지만, 앞으로는 어렵습니다.”
“이번에는 보호자분들을 저희가 배려해드리는 것입니다. 다음부터는 불가합니다.”
이런 조건부 수용과
분명한 선 긋기 는
나도, 팀도, 환자도 지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3. 코로나 시절, 외출 가고싶었던 환자와 보호자
코로나가 한창이던 어느 시기.
한 보호자가 환자의 외출을 요구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면회가 안 되니 가족들이 얼굴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유였습니다.
그때는 보호자 1인도 사전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입실할 수 있었고,
외출은 절대 허용되지 않는 시기였습니다.
저는 보호자에게 상황을 설명드렸고, 당연히 거절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보호자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때, 회진 중이던 주치의 선생님께서 상황을 듣고 한마디 하셨습니다.
“제가 외출하지 말라고 금지한 건데 왜 애먼 간호사를 붙잡고 계세요?
불만 있으시면 저한테 얘기하세요.”
그 말에 보호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이건 제가 설득을 잘해서 끝난 게 아닙니다.
누군가 대신 정리해줬기 때문에 감정 소모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1) 객관적이고 단호하게 말하기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줄 아는 보호자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감정을 빼고, 근거는 담아서 말해야 합니다.
“병원 규정상, 현재는 어렵습니다.”
“제 말을 먼저 들어주세요.”
(보호자가 본인 말만 할 때)
이 말 한마디가 분위기를 바꾸는 열쇠가 됩니다.
2) 혼자 감당하지 않기
진상은 한 명만 물고 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배, 주치의, 당직의사에게 즉시 도움을 요청하세요.
과격한 행동이 있다면 보안팀 호출도 주저하지 마세요.
특히 “의사 불러오세요!” 하는 사람들,
정말로 불러주세요.
간호사에겐 소리치던 분들도,
의사 앞에선 조용해지는 경우, 정말 많습니다.
그리고 꼭 기억하세요.
누가 봐도 진상인데 병원이나 관리자 측이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 병원에서 빠르게 도망치세요.
나를 지켜주지 않는 곳에 내 에너지를 쏟을 이유는 없습니다.
3) 반드시 기록 남기기
폭언, 부당한 요구, 지시 불이행 등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상황은 반드시 기록해두세요.
간단한 메모, EMR, OCS 메모 등
훗날 당신을 지켜줄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병원은 정답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살짝 맞춰주고, 기분을 달래고, 돌려 말해야 할 상황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게 어렵다면,
선배를 부르세요.
그리고 그 상황을 어떻게 정리하는지 곁에서 지켜보세요.
그게 가장 좋은 실전 수업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처음엔 유연하게, 반복되면 단호하게.
한 번은 도와줄 수 있어도, 두 번째부터는 명확히 선을 그어야 합니다.
선생님들이 왜 선배를 부르기 망설이는지, 잘 알고 있어요.
‘안 됩니다’라는 말을 꺼내는 건
그게 선배라고 해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배우기 위해선,
거절도, 단호함도, 눈치도 ‘보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선생님들이 어렵게 부탁하는 만큼,
선배들도 어렵게 보호자의 요구를 거절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주세요.
무조건 예스맨이 될 필요도 없고,
무조건 모든 걸 잘라낼 필요도 없습니다.
균형이 중요합니다.
나도 지키고, 팀도 지키고, 환자도 지킬 수 있는 균형.
지금 그게 어렵다면 괜찮습니다.
배우면 됩니다.
도움을 요청하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상 때문에 무너질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누가 봐도 이상한 사람이고,
당신은 잘못한 게 아닙니다.
오늘도 감정과 상황 사이에서
조용히, 단단히 버텨낸 당신.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