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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sy Sep 29. 2024

6. 너 진짜 글 못쓰더라

글을 꾸준히 쓰는 사람은 결국 나름대로의 작가가 되는 법이다


당신께 나를 보여준다는 두려움이 큽니다
약점을 들킬 것 같고, 혼자 취해있다고 놀림당하는 망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을 만나는 기쁨이 이 모든 걸 부수고 용기를 가지게 합니다
- 배우 구교환




  어디서 현대인들은 진정으로 쉬는 방법은 모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현재의 나에게는 글쓰기가 가장 큰 쉼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글을 쓰는 그 모든 순간이 행복하고 편안한 것은 아니나, 진정한 쉼은 그 행위가 끝났을 때 에너지가 충전됨에 있는 법이다.



  내가 정의하는 기억 속의 가장 오래된 글쓰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남몰래 좋아하던 선생님에게 받은 간단한 편지에 답장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글이란 걸 제대로 써본 적은 없었다. 나에게 백일장이란 그저 숙제처럼 해야 하는 지루한 이벤트였으며,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관심사도 없던 건조한 어린 시절이었다. 그런 소녀가 당장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마음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면서, 장님처럼 더듬더듬 문장과 단어를 고르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연습장에 몇 번을 썼다 지웠다 하다- 에나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답장을 휘갈겨버렸는데 (말 그대로), 이런 마음을 모르는 선생님은 언젠가의 복도에서 한 마디를 남겼다.



“너 진짜 글 못쓰더라ㅋㅋ”



  글쎄. 당시에 내가 절망적인 기분을 느꼈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이상하게 저 한마디는 지금까지도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열망과 함께 수많은 날의 일기와, 남자친구들에게 찔러 넣듯 주었던 편지와, 회사에서 쓰는 형식적이지만 울림을 주고 싶었던 문장이 담긴 메일들을 지나 지금의 나의 글이 되었다. 이제는 약간의 문체라고 해야 할지 느낌이 생겨버려서, 회사에서 익명의 추천사를 써도 선배가 ‘글 보자마자 너인 줄 알았다‘ 알아채버려서 조금은 불편하다. 앞으로 익명의 글은 챗지피티한테 써달라고 해야 하나. 근데 지피티도 특유의 문체가 있는 것 같지 않나요?



  꾸준히 글을 쓰면서 느낀 글쓰기의 장점은, 내 마음과 생각이 조금 더 명확해진다는 것. 고대인들의 기록을 보면 세상의 색깔을 빨강과 주황 사이의 어떤 색 / 흰색 / 검은색 3가지로 나누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은 눈으로 색상을 볼 때도 3가지로만 인식했을 것이다. 언어는 우리가 인식하는 해상도를 나타낸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해상도가 높은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나는 작가가 아니더라도 글을 쓰는 사람을 사랑한다. 아니 글을 꾸준히 쓰는 사람은 결국 나름대로 작가가 되는 법이다. 당신도 나도.



  참, 휘갈겨 썼다 지웠다 했던 연습장은 아마 본가 방구석의 추억박스 안에 잘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오래된 물건은 잘 버리면서 오래된 글은 버리기가 힘든 나다. 그 뒤로 차마 읽어보지는 못했으나 내 마음의 일부분이 그 종이에 남아있는 것만 같아서 버리진 못했다. 하지만 만약 지금의 내가 다시 읽게 된다면 분명 이런 말을 남기겠지.



“너 진짜 글 못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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