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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체리 Jun 09. 2020

시험 중독 탈출 프로젝트 6 -울면서 쉐도우 복싱을

                


나는 밤마다 울면서 나를 단련시켰다



이모, 병원 직원들의 태움을 견딜 수 있겠어요?     

내가 간호조무사 자격시험을 준비하겠다고 말했을 때, 방사선 기사로 근무하는 조카가 나에게 물었다. 조카는 온실에서 자란 상추같이 비리비리한 데다가 멘털까지 약한 이모가 살벌한 병원 판을 잘 이겨낼 것인지 걱정하고 있었다.  

         

조카의 걱정과는 달리 나는 거친 돌밭에서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아직 병원 생활을 겪어보지 않은 나의 허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조카 앞에서 꿀리기 싫은 늙은 이모의 마지막 자존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냥 던져본 생각은 아니다. 나에게는 비정규직 삶을 통해 터득된 '을'로 살아가는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었다. 그 노하우는 간단하다. 갑에게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그냥 참는 것이다! 그것도 웃으면서

.     

초등학교 시간 강사로 일할 때, 새 교장이 부임하면서 강사들의 공간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우리에게 대기 공간을 내주었던 것이 무척 아까웠던 모양인지 교무실 벽에 붙어 있는 의자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교무실 귀퉁이 벽을 보며 수업준비하는 내 모습이 누가 봐도 궁색 맞아 보였지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참을 수 있었다. 을이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은 새벽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각종 문자를 보내왔다. “왜 자기 아이한테 존댓말을 안 쓰냐”는 등의 대답하기 어려운 항의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조심하겠다고 말한다. 학부모의 민원이 학교에 들어가면 다음 계약에서 잘리기 때문이다.  

   

학교를 온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교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잡초 같은 비정규직 강사에게 학교는 돌밭일 뿐이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각자 알아서 견뎌야 한다. 세심한 손길로 벌레를 잡아주고 온도를 맞춰주는 농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정규직에게 온정과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뜻이 아니다. 비정규직으로 살아온 삶이 나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인생에서 의미 없는 경험이란 없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지금은 모든 사람이 정규직이 될 수 없는 세상이니까.   


을이라서 당한 일 때문에 울면서 밤새 뒤척이던 시간들은 오히려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상에 맞설 맷집을 키워주었다. 마치 소심한 복싱 선수가 매일 밤 쉐도우 복싱으로 조금씩 근력과 자신감을 키우듯이 말이다.


 아마도 나는 웬만한 병원 텃세를 내면에서 잘 처리하며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생각보다 터져 오르는 울화통을 조용히 누르며 적어도 겉으로는 평온하게 사회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내 성격대로 되지 않아도 참아야 한다는 것을 을의 세상에서 나는 이미 배웠다.   


 " 응 한번 겪어봐야지 뭐."


라고 나는 조카의 물음에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현실을 겪다 보면 생각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잘 겪어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정주 시인의 시의 어느 부분처럼,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수캐처럼 헐떡거리며' 세상을 향해 돌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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