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 초등교사다.> 22화
기다림이
익숙해졌다는 건
좋은 일처럼 보인다.
조급하지 않고,
아이를 재촉하지 않고,
하루의 속도를
함부로 끌어올리지 않는 것.
나는
그 태도를
조금은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나는 알았다.
기다림도
방심이 될 수 있다는 걸.
아이는
평소보다 더 오래
멈춰 있었다.
연필은
손에 쥐고 있었지만,
종이는
한참 동안 비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도
괜히 안심했다.
‘이 아이는
기다리면 된다.’
그 생각이
먼저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 한 줄의 판단이
나를 멈추게 했다.
나는
보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의 멈춤은
이전과 달랐다.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였다.
아이는
느린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멈춘 것이 아니라,
길을 잃은 상태였다.
그 차이를
나는
늦게 알아차렸다.
그래서
나는
한 발 다가갔다.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지금
어디쯤인지
알겠어?”
아이는
잠시 나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대답은
늦지 않았다.
다만
내가
조금 늦게 들었을 뿐이다.
나는
그제야
아이의 멈춤을
처음으로 보았다.
기다림은
아이를 믿는 태도다.
하지만
그 믿음이
아이를 혼자 두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다린다는 말 뒤에
확인을 생략하는 순간,
관찰은 사라지고
관계도 얇아진다.
나는
그날 이후로
기다림의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보면서 기다리기,
살피면서 기다리기,
필요하면
조용히 손을 내밀기.
기다림은
거리를 두는 일이 아니라
거리를 조절하는 일이었다.
멀어지지 않으면서
가까워지지 않는,
그 미묘한 지점을
지키는 일.
익숙해진 기다림은
편안하지만,
그만큼
무뎌지기 쉽다.
그래서
가끔은
다시 배워야 한다.
지금의 기다림이
정말 기다림인지,
아니면
그저 손을 놓고 있는 것인지.
나는
그 질문을
아침마다
다시 꺼내 보려 한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 초등교사다.
기다림마저
점검해야 하는 자리에서,
아이보다
한 발 앞도 아니고,
한 발 뒤도 아닌,
한 발 옆에 서서
오늘도
함께 방향을 찾는 사람으로
교실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