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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관리본부 최차장의 근황 (3)

개발단계에서 돌보는 건축

by 최지원

이 글은 여성건축인 매거진『SOFA 5 - 혼자이지 않은 건축: 돌봄을 돌아봄』에 기고한 내용을 재편집한 버전입니다. 원문은 해당 매거진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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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사업자가 부동산을 개발한 다음 보유하며 운영하기도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개발사업은 건물을 빠르게 팔아 이익을 남기려고 한다. 그래서 엑시트란 말을 자주 쓰고, 속된 말로 ‘털고 나오기’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차피 내가 보유할 건물도 아닌데 ‘티 안 나게 돈 들어갈 일’은 안하는 게 개발사업의 기본 태도가 되었다. 짓고 팔고 끝내는 식으로 지어지는 건물들이 꽤 많다는 의미다. 그런 태도들이 지속되면서 개발사업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도시 생태계를 일부 파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번 자본주의 놈들(?)을 막아보겠다.’라던가

‘새로운 개발사업의 패러다임을 열겠다.’처럼 거창한 목표는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도시에서 유의미한 건물을 만들기 위해 정체성이 부여된 건물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럼 내 포지션에서 해야 할 일은 뭐다? 설계와 인허가 대부분의 과정을 설계사에서 잘 리드해 준다면, 개발단계 설계관리자는 설계사의 러닝메이트의 역할 정도로 그친다. 나는 기본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 외에 건물의 ‘정체성 관리’를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쓰려고 한다.


건물에 정체성이 굳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프로젝트가 시작할 때부터 착공할 때까지 실제로 체감하는 프 로젝트의 정체성은 ‘살아남는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저렴하게 땅 을 사서 빠르게 싸게 짓고 비싸게 팔아야 한다. 개발이익이 개발 사업에서 가장 선명한 정체성이지만 단순히 ‘빠른 인허가와 공사 최저가’라는 표어로 몇 년 동안의 프로젝트를 이끌어 가기엔 동력 이 딸리는 느낌이다. 결국 빠르고 저렴하게 건물을 짓기로 선방했다고 해도 막상 다 지어진 건물 앞에서 이 프로젝트는 뭐야? 왜이래? 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할 말이 없다면 어떨까. 몇 년을 고생한 건물 앞에서 머리만 긁어댈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젝트 를 이끌어갈 정체성이 필요하다. 그거 아는가. 어린 시절 어른들이 ‘너 꿈이 뭐야?’ 재촉을 섞어 질문했던 걸 돌이켜보면 빨리 스스로 의 정의를 내리게 한 다음에 그에 맞는 행동을 시키려고 했던 지혜 였음을. ‘너 경찰관 된다는 애가 친구들 괴롭히고 그러면 되겠어? 라는 말이 그냥 ’친구들 괴롭히지 마!‘라는 말보다 어린이들의 행 동을 컨트롤하기 더 유효한 방법이라는 연구 결과를 어디선가 읽 었다. 아직 지어지지 않은 프로젝트를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고 바 라본다. 정체성을 주입해 끝까지 설파(?) 하는 작업이 개발 과정에 동력이 된다.

프로젝트의 정체성은 각 프로젝트마다 다르다. 수치로 표현 가 능한 달성 목표가 되기도 하고 고수되어야 하는 컨셉이 정체성이 되기도 한다.

‘반경 1킬로미터 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

‘최근 신규 공급되는 아파트 중 가장 넓은 커뮤니티 면적’,

‘테라스를 활용한 입면디자인’ 처럼 정량적이거나 물리적인 정체성이 될 수도 있고 때에 따라 변하는 공간의 프로그램, 공간 소프트웨어에 맞춰 변해가는 것이 정체성이 되기도 한다.

정체성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사공이 많 아졌을 때(거의 모든 프로젝트에 해당)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을 막 아 주기도 한다. 수많은 회의 시간을 줄여주는 효과도 함께.

그러다 보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도중 반듯한 자세로 ‘이 프로 젝트 정체성이 뭐였죠? 그건 꼭 필요합니다. 아니면, 없애야 합니 다.’라는 멘트를 동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내심 개발사업으로 짓 는 건물도 건물의 정체성이 잘 구현되어 좀 거창하지만 건물이 후 대에 사조6)로 분류될 때 거론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끔 가져 본다. 거기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건물이 철거되기 전까지 이 건물 이 놓인 도시와 시대에 맥락을 잘 맞춘 건물, 최소한 시시하게 그 저 돈 버는 건물이 아닌 것으로 기억되는 일도 상상해본다.


범용성, 누구도 책임질 수도, 책임지지 않는

좋은 건물이 생기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좋은 건축주와 좋은 건축가다. 반면 내가 개발하는 건물들은 사용하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투자자? 임차인? 나이 성별, 구체적인 사 용 용도 등이 흐릿한 가상 인물이다. 주인이 어떤 사람이 될지 확 실하지 않은 공간 설계를 하다 보니 가장 유효한 설계의 태도는 언 제부턴가 ‘범용성’이 되었다. 평범하고 보편적인, 교환하기 용이한, 불특정 다수가 사고팔기에 부담 없는 건축물, 더불어 최적화된 공사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되었다. 지구보다 더 오래갈 거라는 ‘자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건축물’을 위해 일하는 관리자는 범용성과 가성비를 기본으로 한다. 기본이 실천되지 않으면 다음스텝으로 넘어갈 수 없다. 갑자기 생소하고 독창적인 평면, 특정인의 취향과 요구에 맞춰진 건축물을 마주한 ‘수분양자7)’ 라는 타이틀에 가려진 예측 불가능한 가상의 페르소나가 갸웃거리는 모습이 상상되니까. 이런 시행착오와 설득의 과정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개발사업으로 만들어진 공간들은 통상적인 형태와 합리적인 시스템이라는 특징만 남게 되었다. 나는 자연과 사람이 구성하는 생태계에서 ‘다양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다양한 사람과 건축물이 섞이며 만들어가는 이상적인 도시, 이런 생각을 자주 하며 산다. 범용성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맞지 않아 자꾸 이게 맞나 싶긴 한데 현실이 그렇다. 한 예로 몇 년 전 지인이 다니는 시행사에서 하이엔드 오피스텔을 개발하면서 핀터레스트8)나 아키데일리9) 에서 볼듯한 매력적이고 유니크한 평면을 설계에 적용했었다. 분양에 폭망10) 했다. 그 역시 가상의 타겟을 고려한 설계였는데 아마 범용성 적용 범위 밖의 사용자를 상상 했나 보다. 최근 알아보니 그 건물을 다른 용도로 전면 설계변경을 하던데, 그 당시 그걸 보고 나 역시도 뒤에서 함께 수군거렸었지.

‘어쩌자고 혁신을 했어….’


여러 특성이 균형 있게 조합된 결론이 범용성만은 아닌 건물이 필요하다. 치우치지 않은 다양한 필요를 아는 건축주와 그 필요를 폭넓게 구사하는 건축가가 도시 생태계를 건강하게 할 것이다. 그 러기 위해서는 사용자가 처음부터 설계 단계에 개입하는 것이 좋 다. 공간을 판매할 사람의 개입이 아닌 사용할 사람의 개입 말이 다. 다행히 상업용 부동산 중에서도 설계단계부터 입주할 테넌트11) 를 미리 정하는 프로젝트가 종종 있다. 입주할 테넌트가 내정되어 당연히 공실도 없다. 다 짓고 나서야 사용자가 정해져 새 건물 을 다시 두드리고 부셔서 리모델링 공사를 하는 일이 적다. 물론 이런 이상적인 이야기는 입지와 입주 시기 임대료 등 여러 비용이 맞아떨어졌을 때 가능한 이야기라 모든 건물이 미리 테넌트를 정 하는 프로세스를 갖기엔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이제 건물을 짓는 대로 팔리는 시기는 지나갔다. 어쩔 수 없이 건물이 다 지어 진 후의 단계를 고려하여 지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럼 점차 하 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운영까지 고려된 건물이 연속으로 생 겨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나친 평범함과 쓸데없는 독창성을 밀 어내며 누가 사용할지 모르는 타겟을 위해 찾은 ‘범용성’이라는 공 간 특성을 의기양양하게 이야기하는 나 자신도 잠잠해질 것이다.




6) 사조: 특정 시대나 문화에서 건축의 스타일과 철학을 나타내는 것

7) 수분양자: 부동산이나 아파트와 같은 주택을 처음으로 분양 받는 사람

8) pinterest.com

9) archdaily.com

10) ‘폭삭 망하다’의 줄임말

11) 테넌트: 특정 건물이나 부동산의 일부를 임대하여 사용하는 개인이나 기업을 의미, 주

로 상업용 부동산에서 사용되며, 테넌트는 소매점, 레스토랑, 사무실, 호텔, 또는 기타 상업

적 용도로 사용되는 공간을 임대하는 입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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