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노트로 기적을 부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 질문에 대답을 써 본 경험이 많다.
“꿈이 무엇인가요?”
아마도 예상하건대, 쓰고 지우 고를 반복하며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정작 진짜 내 꿈과 만난 것은 수많은 어려움을 뚫고 불혹이 되었을 즈음이었으니, 그 답을 찾기까지도 시간이 너무나 오랜 세월을 보냈다. 40살이 가까워서야 꿈을 만났다고? 한숨이 나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 이유는, 우선 아이 넷을 엄마표로 잘 키우고 있고, 글을 쓰고 책을 집필하는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몸 관리까지 잘해서 바디 프로필을 멋지게 찍고, 게다가 더 큰 꿈을 향해 거침없이 나가는 행보를 하고 있어서일 게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 해내셨어요?”
이구동성으로 내게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소원 요정’을 말한다. ‘소원 쓰기’라는 것은,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바라고 이를 매일 적어가는 행위를 말한다. 사실 이에 대해 벌써 이야기한 유명인사도 많다. 스노 폭스 김승호 회장도 생각의 비밀에서 “하루 100번씩 100일 동안 쓰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했고, 김미경 강사도 회사를 살려낸 리부트 시나리오를 써낼 수 있었던 것은 3권의 리부트 노트를 쓰고 나서라고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노자로 비롯한 수많은 동양 사상가부터 서양 철학자까지 쓰면 이루어진다는 진리가 면면히 전해져 왔다. 잠재의식을 바꾸면 인생이 달라지고 그 잠재의식을 바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내가 원하는 바를 쓰는 것이다.
실제로 나도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꿈을 모두 ‘소원 쓰기’로 이뤄냈다. 꿈을 꾼다고 다 이루어 내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오랫동안 성실하게 쓰다 보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것, 내 지난 삶이 그 진리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가 되었다.
나의 ‘소원 쓰기’ 운명적 시작
어느 한 초등학교 2학년 교실에 맨 끝자락, 작고 까만 얼굴 위로 너무도 촌스러운 뽀글 파마머리를 한 아이가 앉아있다.
‘입을 열면 사투리가 세어 나올까 두려운 걸까?’
작고 고집스러운 입을 굳게 다물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교실을 응시했지만, 고개는 책상으로 파묻고 있다. 아이는 처음에는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시키지 않는 것에 안도했고 고마웠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지독한 소외를 느꼈다. 그때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연필을 쥐고 이제 막 배운 한글을 책 모퉁이에 끼적거리는 것뿐이었다.
아이는 수업시간이 제일 좋았다. 종이 울리고 쉬는 시간이 되면, 주위엔 친구들은 왁자지껄 한바탕 놀아대는데 여전히 망부석처럼 앉아있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는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다. 다시 수업이 시작되면 연필을 손에 쥐고 책 모서리와 노트에 나만의 말들을 써 내려갔다. 그 시간만이 평화로웠다. 그 작은 아이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손에 쥔 연필을 놓지 못했다. 오직 쓸 때만이 외롭지 않았던 어린 시절, 그렇게 쓰는 것으로 존재감을 슬슬 드러내던 아이는 학교 백일장을 시작으로 교내외 글짓기 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리고 외로움을 쓰는 방법을 어려서부터 터득하자 자아도 글로 찾아갔다. 완벽한 가정도, 완전한 직업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 글로 얻었다. 글을 쓰지 않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글을 써야 하는 숙명인 그녀는 30대를 헛짓으로 헤매 이다가 다시 글 쓰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현재 글을 쓰라고 잔소리를 엄청 하는 아줌마로 살고 있고,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책으로 남기는 할머니로 늙어갈 것이다.
이 작고 촌스러운 소녀는 바로 나의 9살 이야기다. 나의 운명의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 인생의 주요 증거로 들이대면서 글을 쓰면 이루어진다는 메시지가 담긴 책을 남기고 있는 중이다.
소원 노트가 불러온 남자
교회에는 ‘배우자 기도’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내가 평생을 같이 살고 싶어 하는 배우자에 대해 자세하게 희망하는 대로 쓰고 바라고 기도하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내가 20대 내내 내가 해왔던 것이 바로 배우자 기도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평생을 두고 마음을 나눌 한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다이어리에 썼다. 나의 성공이나 취업보다 항상 1번으로 그 소원을 앞세웠다. 이 간절한 소원이 현실로 이뤄지는데 까지 지독한 시험기간을 거쳤다.
방황이 짙던 20대를 통째로 쓸어 담아 자루에 묶어서 던져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쯤에는 사실, 내가 원하는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거의 내려놓았다. 내 나이에 흐름에 따라 주위에는 취업을 했거나 현실에 맞춰 결혼을 하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성격상 도저히 결혼을 타협으로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내가 만족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 내 위치를 찾지도, 돈이 되는 일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이 시점에 무엇을 위해 살아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방황을 했다. 늦게까지 지나치게 방황을 하다 보니 눈치가 보였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떠나보고도 싶었다. 그렇게 계획도, 생각도 없이 충동적으로 떠난 미국, 나는 운명적으로 그를 만났다.
맨해튼의 작은 토플학원 강의실에 구석자리의 앉아있던 그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아.. 제발 아니기를.. 첫눈에 너무도 선명하게 들어온 그 느낌 그가 아니기를’ 이럴 수가. 부정해 봐도 맞다. 다이어리 요정에게 그토록 간절히 써왔던 그 남자는 하필이면 나이 꽉 찬 어학 연수생이었다. 가혹한 운명, 현실이 너무 아득해 보이는 이 사람, 나는 왜 늘 이런 어려운 선택의 연속인 걸까?
하지만 누구도 탓할 수 없다며 나는 현재 소원 방 멤버들에게 이렇게 예를 들어 말하고 한다.
“다이어리 요정은 말 한 대로만 이루어주니까 소원을 쓸 때 구체적으로 쓰셔야 해요. 제가 남편감 두고 소원 쓰기 할 때 대화가 되는 사람, 인격이 갖춰진 사람, 가슴이 따뜻한 사람,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나와 평생 웃을 수 있는 사람 이런 것 모두 쓴 대로 다 됐는데, 직업란을 깜박하고 안 썼더니, 직업이 없는 사람을 보내주더라고요. 융통성 1도 없는 다이어리 요정이니 원하는 것이 있으시면 구체적으로 쓰셔야 해요”
이 에피소드를 들은 우리 멤버들은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애써 웃으면서 정색하고 디테일하게 구체적으로 소원 쓰기를 시작한다. 다이어리를 구체적으로 써야 하는 이유가 되어버린 자랑스러운 나의 남편, 다행히 이제 직업이 있다.
다이어리 요정이 불러낸 엄사 친(엄마 사람 친구)
네 아이와 함께 매일 고군분투하던 시절 육아 10년간도 매일 다이어리를 썼다. 보통 엄마들은 아이의 일상을 기록하는 ‘육아일기’를 쓰지만, 나의 다이어리를 들여다보면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일부이다. 대부분은 ‘아이를 키우는 나의 이야기’였다. 자기 연민이 해결되지 않는 나에게는 오롯하게 아이들 모습에 집중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육아의 외로움이 오히려 엄마 사람 친구를 애타게 찾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내가 만난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이라는 대상에만 관심이 있는 듯했다. 아이를 키우고는 있지만 나 자신을 키우는 일을 끝내지 못한 자아 사이에서 나는 항상 혼란스러웠다. 아이 말고 그들을 키우는 엄마 자기 얘기하고 싶어 하는 나는 이기적이고 이상한 사람으로 비쳤다.
‘나는 엄마들의 편안한 수다. 그 조차도 잘 못하는 사람이었구나.’ 엄마들 커뮤니티에 나를 몇 차례 슬쩍 넣어봤다. 하지만 이내 슬쩍 넣어 보았던 고개를 들어다 다이어리에 처박았다. 오로지 그 세상에서만 솔직한 나로 존재했다. 난 엄마이지만 여전히 아이 얘기가 아닌 내 얘기를 하고 싶었고, 그 집 아이 아닌 그 아이를 키우는 엄마 얘기가 궁금했다. 왜! 도대체 왜! 다 자기는 없고 아이 얘기, 남편 얘기, 궁금하지도 않은 시댁 얘기만 하는 걸까?
내가 이기적인가? 이상한 건가?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막연해 보이지만 어딘가 있을 것 같고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웃 엄마도 되고, 내 얘기 편하게 하는 친구도 되고, 성장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소원 노트에 썼다. 이왕이면 내 아이들과 같은 학교 학부모 엄마라면 더 좋겠노라고 찐 엄마 동지애가 필요할 때마다 다이어리에 소원 칸을 채웠다.
이 얘기를 할 때마다 남편은 당신 입맛에 맞는 그런 딱 맞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며 현실에서 찾으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흥! 그러는 당신도 난 그렇게 만났거든’ 하며 다이어리 요정의 실력을 믿었다. 내가 원하는 엄사 친 조건을 틈나는 대로 생각했고, 습관처럼 썼다. 그렇게 찾아 헤매 인지 십 년쯤이 흘렀다. 햇살이 싱그러운 초여름 우리는 그녀의 사무실에 커피 한잔을 사이에 두고 마침내 마주 앉았다. 일상으로 시작하는 대화를 몇 마디 나누자마자 딱 느낌이 왔다. 10년 전 내가 남편을 알아봤을 때 느낀 바로 그 느낌이었다.
1대 1 브랜딩 코칭으로 만난 그녀와 하고 싶은 일과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제 막 처음 만난 사이인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내 얘기를 솔직하게 할 수 있었고, 엄마로서 아이들 얘기까지 나눌 수 있었다. 게다가 동네 이웃이라 슬리퍼 신고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이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우린 마음 맞고 시간 맞으면 시시때때로 동네 커피타임을 가졌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같은 학교 학부형이었다. 그 집 아이 셋과 우리 아이들 넷은 모두 같은 학교 학생이다. 나와 내 다이어리와 남편만이 아는 사실, 내가 원했던 디테일까지 완벽하게 맞는 대상을 만나는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남편을 만났을 때 직업 칸을 채우지 않는 실수를 면하려고 ‘같은 학교 학부형이기도 한’이라는 구체적인 요구조건을 넣었는데, 설마 하던 이게 현실이 되었다.
‘와... 다이어리 요정, 너 정말 있구나!!’
이건 정말 보이지 않는 힘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난 결국 다이어리에 쓴 대로, 토씨 하나 안 틀린 맞춤형 엄마 사람 친구를 평생의 메이트로 가지게 됐다. 내가 나 자신을 믿기도 전에 나를 알아봐 준 사람이 있어 감사했고 평생 실컷 헌신하고 싶은 곳을 만나게 되어 정말 행복하다. 앞으로 맘 메이트 컴퍼니는 나의 사명이기도 하다.’ 그 날 이후 엄마 그리고 나다움으로써의 진짜 내 인생이 시작됐다.
첫 리더의 경험, 작 함소(작가와 함께 소원 쓰기)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면식이 없는 대상을 향해 ‘블로그 모집’이라는 것을 해 보았다. 이름 하여 작 함소, 작가와 함께 소원 쓰기다. 지난 내 경험을 꺼내 나눌 수 있다면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내게 된 모집 공고였다.
퍼스널 브랜딩 수업을 듣고 나를 많이 깨워냈다고 생각했는데도 실행으로 쉽사리 연결되지 않았다. 프로젝트의 졸업 작품 격인 공지 글을 내야 한다고는 하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때가 아니라는 말을 앞세웠지만 사실은 두렵고 귀찮았다. 너무 배우고 싶다며 매달렸던 브랜딩 공부인데 막상 실적을 내라고 하니 그 현실은 일단 피해 가고 싶은 마음이랄까? 네 명이 어깨에 타 올라 있는 내 인생 책임지기도 힘든데, 게다가 코로나 시국에 남의 인생 들여다보고 뭔가 책임져 줄 일을 비용을 받고 선언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감이 실렸다. 전업 맘으로 오래 살아서일까? 사회 밖으로 한 발 내딛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지, 그래도 나름 자기 계발을 쉬지 않고 해 온 나였는데,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 나와 계속 싸워도 결국은 숨어들고 싶었다.
몇 번 요령 피우다 보면 권하다 말겠지 하고 버티기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 선생,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 집 앞 카페에 불러다 앉혀놓고 뭐를 뚝딱 만들어주면서 이걸로 시작하라고 한다. 카톡으로 수시로 했는지, 안 했는지, 언제 할 것인지, 선한 감시망을 거두지 않았고, 내리 눌리면 튕겨나가는 내 모양 결에 따라 맞춤형으로 압박과 회유를 반복해왔다.
여기서 딱 한걸음만 더 나가면 할 수 있다. 다 그렇게 첫발을 시작하는 거다. 일단 공고를 내 보고 나서 그다음을 생각해라. 하다 보면 거기에서 또 길이 보인다. 이런 말에 고개는 끄덕이면서도 실행은 유예시키는 나는 불혹이 넘어 다시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인생 챙기기도 바쁜 세상에 나를 포기하지 않는 그 마음이 결국 내 심연을 건드렸다. 그 힘이 끝내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렇게 끝까지 움직이게 하는 이 사람, 내 소원 노트에 사는 다이어리 요정이 소환한 사람이지 않은가? 나를 그토록 귀찮게 하던 분이 현재는 함께 일하고, 반찬 나눠먹고, 아이들 학교 학부모에다가 동네 커피 친구기도 한 주고 있는 우리 회사 대표님이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만들어낸 나의 첫 공식 모임 작함소(작가와 함께 소원 쓰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곳에서 또 많은 나와 같은 엄마들이 원하는 바를 쓰고 소원 요정을 만나고 그렇게 하나씩 둘씩 꿈을 이루어가고 있다. 5년 전 그날의 소망한 것들을 모두 현실로 이루고 사는 나는 이제 그 어떤 모임에도 기웃거리지 않고, 그 어떤 소속감도 부럽지 않다.
나는 요즘 정말이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