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마자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염소 즙 한 팩을 뜯었다. 내키지 않는 일일수록 빠르게 처리해라, 돌아가신 아버지가 내게 가르친 수많은 법칙 중의 하나였다. 그의 가르침 덕분일까, 나는 일을 미루는 법이 없었고 늘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아버지의 말대로 행동해서 잘못된 일은 없었다. 나도 아이에게 그런 부모가 되어줄 수 있을까, 아니,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염소 즙의 지독한 향보다도 더 괴로운 건 끈덕끈덕한 식감이었다. 동물의 것임을 잊지 말라는 듯 진득하게 흐르는 액체. 내가 먹고 있는 건 그저 건강식품이 아니라 사계절을 겪어보지도 못한 새끼 염소의 내장을 빼고, 통째로 달여낸 액체였다. 인간의 아이를 잉태하기 위해 어린 짐승의 삶을 빼앗을 권리를 누가 나에게 부여했는가. 삼십 년이 넘도록 짐승의 고기를 먹어왔으면서도 도통 이 염소 즙에는 익숙해지질 않았다.
남편은 동이 트기 전 집 밖을 나섰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오래 근무했던 그이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사내에서 가장 성실한 직원이었다. 아버지는 남편에게 검정고시를 보게 하고, 영어를 배우게 하고, 그리고 또…. 나를 만나게 했다. 아버지의 주선으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운명의 배우자를 만났다기보다는 잃어버렸던 형제를 찾은 기분이었다. 내가 집에서 아버지의 말을 따르고 있을 때, 그는 회사에서 아버지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설렘을 느껴보지는 못했지만, 남편은 분명 내 짝으로 제격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영 매가리가 없고,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사내가 아니라 다행인, 내 몸을 지극정성으로 살펴주었다. 뿐인가, 변변한 직장을 다녀본 적도, 다닐 일도 없는 내게 타박 한번 없이 집안일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어쩌면 돌봐줄 사람이라고는 없이 세상에 혼자인 점도 아버지의 눈에 들었을지 몰랐다.
아버지는 본인이 없어도 누군가가 나를 돌볼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고 간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도록. 그러나 아버지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도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아이는 간절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뜻이 완고했다. 나와 같이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평생을 살아온 어머니는 내가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을 감독하는 것이 본인의 남은 과업이라고 믿었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뚜렷한 답을 주셨을 테지만 그는 없다. 우리는 그저 그의 뜻을 추측하며 살아갈 뿐이었다.
남편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깨끗이 정돈된 침실에서 두 시간 정도는 뒹굴 작정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부드러운 면에 몸을 비비는 일은 아버지가 모르는 나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맨몸으로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워있노라면 다시 태아가 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시간을 채 십 분쯤 즐겼을까, 뜻밖의 방해자가 방문했음을 현관 벨이 요란스럽게 알려왔다.
"세은 씨, 집에 있어요?"
현관 벨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이불을 끌어안았다. 맨몸으로 뒹굴던 나를 누가 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갑작스러운 방문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예상치 못한 일은 그것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간에 반갑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내 인생이 지루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를 부른 목소리는 이웃집에 사는 혜영이였다. 그녀는 늘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웃들을 기웃거리곤 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 그녀의 방문은 점점 더 잦아졌다. 나는 황급히 잠옷을 걸치고 현관으로 향했다.
"혜영 씨, 무슨 일이에요?"
나는 문을 반쯤 열고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어딘가 심각해 보였다.
"잠깐 얘기 좀 할까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살폈다. 마치 누군가 우리를 엿듣고 있을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문을 살짝 열었다. 그녀의 통통한 몸집이 간신히 문 사이를 지나왔다. 까시러운 가시나, 깡마른 거 봐라. 늘 나를 타박하는 어머니가 혜영을 보면 복스럽다고 칭찬할까. 그녀를 내가 건네는 음료를 앉기도 전에 반쯤 들이키더니 철퍼덕 자리에 앉았다.
"세은 씨, 이거 내가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말을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뗐다.
"남편분한테, 여자가 있는 거 같아요."
혜영이 뱉은 말이 아침에 마신 즙처럼 진득하고 불쾌하게 내 귀에 달라붙었다.
"…무슨 소리예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되물었다. 내 반응 탓에 혜영은 아까보다 자신감을 얻었는지, 속사포처럼 대답을 내놓기 시작했다.
"지난주에 봤어요. 카페에서, 우리 동네랑은 좀 멀지. 나도 오랜만에 간 거예요. 그 동네는. 여자가 우리 또래 같더라고. 그냥 친구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어. 내가 말했다고 하진 말고, 한 번 알아나 봐요."
동정과 호기심이 뒤섞인 혜영의 눈빛이 내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녀가 기대하는 나의 반응은 무엇일까, 화를 내며 당장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나, 아니면 울며 무너져야 하나.
나는 별 반응 없이 앞에 놓인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대답할 말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만날 리 없다. 내가 그토록 확신하는 이유는 그가 나를 열렬히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나의 형제였다. 아버지의 아래에서 나와 함께한 사람, 나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아닐 거예요. 저번 주에 건물 증축 때문에 그 동네에서 중요한 미팅이 있다고 했는데, 그 자리였나 봐요. 남편한테 한 번 물어볼게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혜영의 입을 막을 필요는 있었다. 또 다른 이웃에게 엄한 소리를 지껄이지 않도록, 적당한 핑계를 붙여주었다. 그녀는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눈알을 굴렸다. 아쉬운 모양이었다. 상상력을 발휘해서라도 증거를 찾고 싶겠지. 그녀는 나의 불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얇은 입술을 움직일 핑곗거리를 찾고 싶을 뿐. 아버지는 남의 말을 입에 올릴 때는 늘 신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혜영에게도 그 가르침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참을성이 강한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 중의 하나였다. 인내하라, 성실하라. 아버지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남편에게 직접 그 여자에 관해 묻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모든 정보를 내 눈으로, 내 손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고요한 집 안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어머니의 부름으로 친정을 방문하거나, 남편과 함께하는 주말의 외식을 제외하면 내가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에 있는 수영 강습이 전부였다. 수요일까지는 아직 6일이 남았다.
혜영의 말을 들은 탓인지 남편이 모습이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평소보다 30여 분 귀가가 늦는 일은 회사의 사정에 따라 전에도 간혹 있었지만, 구태여 나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는 점이 그러했다. 그럼에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가치 없는 사람과 어울리지 말라고 단언해 주셨을 터였다. 나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았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부재가 피할 수 없는 한낮의 자외선처럼 피부 깊이 와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