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적한 계절 下

by 시은

수영 강습을 대신해 남편의 행적을 확인하기로 마음먹은 날이 돌아왔다. 나갈 채비를 하는데 거뭇한 기미가 눈에 들어왔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잡티 없이 깨끗한 피부는 내심 나의 자랑거리 같은 것이었는데. 순간 남편이 만났다는 여자의 피부에는 기미 따위는 없는지 궁금해졌다. 실체도 확인되지 않은 여자의 얼굴을 상상하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르릉, 소리가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

내 방 안보다 오히려 더 안전한 공간이 차 안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나를 침범할 수 없는 독립된 공간. 차량의 금속이 나를 단단히 둘러쌓고 있는 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정감을 내게 선사했다. 정차 중에 다른 이의 삶을 관음 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짙게 선팅 된 창문 밖으로 다른 운전자들의 심드렁한 표정을 관찰하며, 그래, 내게만 삶이 지루한 것은 아니구나. 위안 삼고는 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회사였다. 남편의 차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면 우선 오늘의 일정은 끝이다. 만약 남편을 마주친대도 회사라면 둘러댈 핑계는 많았다. 그가 늘 주차하는 자리로 가는 길에 꼭 무작위로 선물이 들어있는 박스를 열어보는 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낙첨이었다. 남편의 자리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남편은 외근에 갈 때는 항상 회사 차량을 이용했다. 남편의 차가 없다는 것은 그가 개인적인 용무로 자리를 비웠다는 뜻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실은 당연히 남편이 회사에 있을 거라 짐작했기에 곤혹스러웠다. 제자리에 있는 차를 확인하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 잠시나마 불필요한 감정을 소모한 것을 후회하려고 했다. 몇 번쯤 그런 일을 반복하고 역시 아버지의 눈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려고 했다. 이제 상황이 바뀌었으니, 혜영의 말을 다시 되짚어본다. 혜영이 남편을 봤다고 했던 카페의 이름을 기억에서 더듬어 끄집어냈다. 거기에도 남편의 차가 보이지 않으면,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오늘 어디 갔었는지 물으면 그만이었다. 남편은 합당한 대답을 내놓을 테고, 그러면 다시 끝이었다.

카페는 회사에서 제법 거리가 있었다. 엔진소리에 맞추어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30분쯤 지났을 때 카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 외곽에 있는 카페의 주차장에는 넓은 크기가 머쓱할 만큼 띄엄띄엄 차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몇 대 없는 차 중에는, 남편의 차도 있었다. 예상대로 되지 않는 하루였다.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남편의 차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하고 차 안에서 머리를 식혔다. 남편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차 안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남편과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차창 밖으로 카페의 유리창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희미한 실루엣이 간간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버지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침착하고 논리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행동했을 것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침내 카페 문이 열리고 남편이 나왔고 그 뒤를 따라 나온 여자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막혔다. 그녀는 한눈에 봐도 나와 닮아있었다. 마치 거울 속의 낯선 사람을 보는 기분이었다.

나와 닮은 여자. 남편은 왜 나와 닮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일까.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분노일까, 남편에게 이렇게 격한 감정을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주차장에서 마저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그녀는 울고 있었고, 남편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 와서 정신을 차린 남편이 작별을 고하기라도 한 걸까. 머릿속 상상력이 바쁘게 시나리오를 써 내렸다. 남편이 먼저 차에 올라탔고, 여자도 각자의 차로 향했다. 나는 남편의 차를 따라갔다. 집까지 가는 길, 내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뒤죽박죽이었다. 어떻게 추궁해야 할까.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 평소처럼 떠올려보려 했지만, 감정이 앞섰다.

집에 들어선 남편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미소까지 지었다.


"어디 갔다 왔어?"


직설적인 물음에 남편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회사 갔다 왔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거짓말."


남편의 얼굴이 굳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봤어. 다 봤다고."


남편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떤 변명이라도 듣기를 원하며 내 몸이 떨리고 있었다. 남편은 대답 대신 나를 감싸 안았다. 그를 강하게 뿌리치는 내 모습이 생경했다.


남편은 한참을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 사람, 네 여동생이야."


나는 귀를 의심했다. 당장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거라면 정말 터무니없는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야?"


남편은 천천히 설명했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사이에서 낳은 딸이 있었다는 것.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쩔 수 없이 처리해야 할 문제들로 인해 그녀와 교류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존재를 어머니도 알고 있다는 것.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평생을 살아온 내 세계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나만의 아버지도 아니었다. 그날 밤, 나는 잠들 수 없었다. 남편은 숨겨서 미안하다며, 아버지를 대신해 계속해서 해명했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떤 말로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아침은 끝내 찾아왔고, 습관처럼 냉장고에서 염소 즙을 꺼냈지만, 포장을 뜯는 순간 구역질이 밀려왔다. 그 끈적한 액체가 갑자기 혐오스러워졌다. 나는 그대로 싱크대로 가서 염소 즙을 모두 흘려보냈다. 진한 갈색 액체가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내 안의 무언가도 함께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쌓아왔던 모든 게 그 끈적한 액체와 함께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남편에게서 들은 그녀의 이름으로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검색창에 그 이름을 치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렸다. 수많은 SNS 계정을 집요하게 뒤져서 그녀의 프로필을 찾았다. 그녀의 일상은 평범했다. 직장 동료들과의 점심, 길가에서 본 귀여운 강아지 사진, 주말에 본 영화 후기. 그녀의 게시물에는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다. 그녀는 주변에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불행한 모습? 외로운 모습? 아니면 나보다 행복한 모습? 화면 속 그녀는 그저 평범한 스무 살 후반의 여자였다.

나의 일상도 그대로 흘러갔다. 어머니는 아이 소식을 재촉하며 각종 건강식품을 보내왔고, 혜영은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 부부를 관찰했다. 다만 나는 남편과 더 자주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고, 때로는 침실에서 함께 맨몸으로 뒹굴기도 했다.

다만 아버지의 부재는 내게 더 이상 절망적인 공허함이 아니라는 사실이 변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내게 '내키지 않는 일일수록 빠르게 처리하라'라고 가르쳤지만, 정작 그 자신은 오랜 시간 미뤄둔 문제가 있었던 셈이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아버지를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감정도 조금 달라졌다. 어머니, 나의 가여운 어머니는 언제부터 그 애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까. 그 애의 존재를 알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어머니가 가여우면서도 단단하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아버지라는 사람을 감당해 왔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가 생각나지 않던 어느 날, 남은 염소 즙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이 또한 누군가의 삶이었다. 나처럼 태어나, 나처럼 자라, 그리고 지금 내 몸 안으로 들어와 또 다른 생명을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홀로 어둠 속에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면 저 어딘가에 나와 같은 피를 나눈 자매가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낯설었지만, 어쩌면 그녀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내 삶의 경계를 의식하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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