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틀 만에 출근했다. 이틀 만에 출근하니 하늘이 더 밝아져 있다. 밝아진 하늘 아래 발가 벗겨진 기분이 든다. 어둠 속에 꽁꽁 숨어있다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해가 뜨는 걸 막을 순 없다. 밝아져 버린 하늘을 두 손으로 가릴 수 있는 법은 그저 내 눈을 가리는 것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내 눈을 가려도 사람들은 태양 아래 나를 본다. 그러니 결국엔 도망칠 곳은 없다는 것이다.
2
두고 온 것
출근하다가 흠칫해서 보니 전에 쓰던 핸드폰을 두고 왔다. 없어도 되지만 아직 있으면 좋은 거라 조금 늦는 걸 감수하고 차에 돌아갔다가 왔다. 결국 늦지 않았지만 조금 늦었다. 마음이 불편하고 편해졌다.
3
혼자 여행가 본 적 있어요?
혼자 여행 가본 적은 없지만 혼자 살고 있어요. 가족이 있어도 남편이 있어도 아이가 있어도 결국엔 사는 건 혼자더라고요.
혼자라서 무서울까 봐요. 외로울 게 걱정이 돼요.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마음껏 외로울 시간, 무서울 시간도 없을 거예요. 무조건 고지.
4
전산 오류
처음엔 그랬다. 다들 별것 아닌데 왜 이렇게 호들갑인가 했다. 이런 걸로 이렇게? 나도 몇 달을 일하다 보니 별것 아닌 것에 열도 내고 화도 내게 된다. 그보다는 그래야 할 것 같다. 오늘은 전산 오류로 매장 재고가 맞지 않았단다. 야간에서는 발을 동동 구르며 판매된 제품의 영수증까지 모아두었다. 아침이 오고 정확히는 담당 직원이 출근하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재고는 들어맞았다. 재고가 맞지 않았던 새벽부터 9시가 넘는 시간까지는 모두 발만 동동 굴렀는데, 이제는 평화롭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발을 동동 구르는 일도 얼마 뒤면 평화로워지겠지 싶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겠지 싶다.
5
식권
한 달 식권이 한 장 남았다. 앞으로 5일은 더 출근해야 하는데. 꼬박 돈을 내고 식사를 하던지, 도시락을 싸다녀야 한다. 뭐 둘 다 괜찮은데 나는 밥도 사 먹고 싶고 커피도 사 먹고 싶다. 무엇보다 지금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먹고 싶은데 참아야 한다. 집에서 타온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애꿎은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고 있다. 일을 하면 어쩌나 더운지 선풍기가 없으면 안 되는데, 오늘 매장 밖은 이리도 쌀쌀해서 나를 시험에 빠지게 하는지. 그래도 오늘은, 오늘만큼은 버텨본다. 아아로!
6
김혜자
천국보다 아름다운, 이라는 드라마를 어제 보았다. 손석구는 멋지고 김혜자도 좋다. 그런데 뭐랄까 돈 내고 영상을 보는 건데 기왕이면 배우는 예쁘고 멋진 사람이어야지 했다. 할머니가 주인 공인 드라마는 별로이다 싶을 만도 한데, 아니다. 젊음의 미를 뛰어넘는 배우가 있다. 김혜자(왠지 선생님을 붙어야 할 것 같다. 배우님이라도 붙여야 하나. 그러면 손석구는 오빠를 붙여야 하나 둘 다 배우님이라고 붙어야 하나 머리가 아파서 이름으로 쓴다.)를 보고 있으면 엄마 같기도 하고 정말 예쁘기도 해서 자꾸만 빠져들어서 보게 된다. 손석구와 나이 차이가 무색한 소녀다움이 어쩜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나올까 싶다. 내면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그래서 김혜자가 연기를 하면 그건 인생이 된다. 덕분에 어제 늦은 밤까지 넷플릭스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저 한마디로 정의되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혹은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나도 굵어진 손마디에 어떤 날에는 속절없이 눈물이 흐르고는 한다. 이 굵어진 껍데기 속에는 여린 손가락이 있는데. 누구에게 보여줘도 예쁘다 소리를 들었던 시절이 녹아 있다. 나의 젊음을 오롯이 기억하는 것도 제대로 아는 것도 단 한 사람뿐이다. 바로 나 자신. 80이 되어도 지금의 내가 보일 수 있는 사람으로 나이 먹어야겠다. 김혜자처럼.
7
번 것보다 더 받은 날
오늘 팀장님은 아이 바람막이를 나눔 해주셨고(물론 맞지 않으면 다시 가져오라는 조건부였지만) 다른 직원분은 금요일에 보드게임을 가져와주신다고 했다. 일을 하다 보니 이렇게 하나 둘 나눔을 받는 일이 생긴다. 나눔이라고 쓰고 선물이라고 읽고 싶다.
8
초록 벚꽃
남편과 나는 하얀 벚꽃을 좋아한다. 이파리가 난 벚꽃을 보면 이렇게 외쳤다.
와, 올해 벚꽃은 망했다.
없어도 순간을 놓치지 말자고 하는 나와 남편은 봄이 되면 꽃을 찾아가고 가을이 되면 단풍을 찾아다녔었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뒤 덜해졌지만. 특히나 내가.
올해는 쉬는 날만 되면 비가 오거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정말 비가 꽃을 후드려패는 듯이 내려서 하얀 벚꽃은 찰나였고 초록이 듬성한 깔끔하지 못한 꽃만 보게 되다. 비가 그치고 나무에서 상쾌한 방울 소리가 나는 듯해서 나무와 하늘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화롭다. 맑게 갠 하늘, 연한 초록의 이파리와 하얗고 연한 분홍색, 보라색, 노란색, 갈색 그 모든 색이 너무나 조화롭다고. 나는 조경 전공인데 공부를 하면서 궁극적으로 조성해 보고 싶은 그런 날의 풍경이었다. 사람이 나무의 순간을 망했다고 정의할 수 있을까. 나무는 그 어느 때보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에 목말라 팝콘처럼 꽃과 잎을 터트리는 이 계절을 만끽하고 있는데. 망한 건 없다. 언제고 축복만 있다.
9
이제 퇴근을 하고 차로 돌아가면 9시간 동안 후끈하게 데워진 차가 기다리고 있다. 가방은 조수석에 던져 놓고 재킷 더 벗어던진다. 차에 타 시동을 켜자마자 네 개의 창문을 모두 내린다. 차가운 바람이 빠르게 차와 나를 식혀준다. 등과 엉덩이는 뜨끈한데 볼은 시원해진다. 바람을 맞고 있다가 창밖의 하늘을 바라본다. 그야말로 구름 한 점 없는 맑게 갠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 주차장은 으리으리하게 세워진 건물 사이에 있고 땅에는 초록의 생명들이 솟아나 있다. 도시의 건물과 공항과 하늘과 땅. 정교하게 수놓아진 곳에서 솟아난 초록의 생명체들이 즐비한 곳에 내가 있다.
가진 거라곤 늙어가는 몸뿐이다. 그래도 좁은 차의 낡은 차에서 4월의 하늘을 바라보는데 그냥 좋았다. 누군가 최경자 작가에게 물었다지. 왜 글을 써? 그랬더니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너는 왜 안 써? 갑자기 그런 질문이 떠올랐다. 너는 왜 실아? 살지 않을 이유는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데, 살 이유는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는 때때로 말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하지 못하는 것에 더 끌리고 확신을 가진다. 살 이유를 더 찾아보기 위해 나는 더 살아야겠어. 너는 왜 안 살아? 질문을 한 대상은 누구였을까.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10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햇살 때문일까 피로 때문일까 꾸벅꾸벅 졸며 책을 읽었다. 나의 10대를 거칠게 채웠던 하루키. 그의 달리기 에세이를 바람과 함께 읽으니 나도 달리는 기분이다. 하루키가 묘비명을 미리 생각해 뒀길래 나도 하나 생각해 봤다.
윤다희, 드디어 쉰다.
태어날 때 부모님께서 주신 이름을 품고 나는 드디어 편히 쉬겠지.
11
운동이 너무 가기 싫었다. 나는 뭐든 열심히 하니까. 지금 나는 지쳤는데 열심히 하기 싫은데. 거울을 보고 다짐했다. 그래 스쾃 4세트, 데드리프트 4세트만 하고 스트레칭하고 씻고 오는 거야. 그러나 애플워치 기록, 운동시간 1시간 반. 내가 한 것 : 케이블 로우, 바벨 로우 포함 등, 가슴, 복근, 전후 폼롤러.
이렇게 가는 거구나. 스스로를 유혹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