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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솜 Jul 10. 2023

운 좋은 여행: 러시아

갑자기 시베리아 횡단열차

 스물넷, 그때의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존재조차 몰랐다.


 초초가 나를 찾아왔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탈거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쭈욱 갈 수 있다고 한다. 중간에 내리지 않으면 일주일 내리 기차를 타야 한다고. 일주일 동안이나 가는 기차가 있다고? 그게 너의 버킷리스트라고? 그즈음이면 내가 퇴사할 수 있는 시기인데, 같이 갈까? 그렇게 그냥 떠났다. 일정도 제대로 모르고,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뭔지도 잘 모른 채 정말 '그냥'

시베리아 횡단열차 티켓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 위해 준비한 것은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른 것이었다.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기억나는 것은 이 정도뿐. 비행기 화장실과 같은 곳에서 씻기는 불가능할 테니, 나는 횡단열차를 탈 동안 머리 감는 것을 포기했다. 내 머리는 갓난아기 때 이후로 가장 짧아졌다. 짧아진 머리만큼 생각도 짧아졌는지, 결국 또 쓸데없는 짐을 이고 지고 횡단열차를 탔다. 가벼워진 머리카락의 무게만큼 여행의 짐도 가벼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느꼈지만, 짐 줄이기는 역시나 실패했다. 간만의 면세 찬스를 쓰겠다고, 혹시나 쓸 수도 있는 것들을 다 챙기겠다고. 미련한 나.

 어딜 가나 있는 한국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중년의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 언젠가 나도 그 나이에 다다른다면 이들처럼 두려움 없이 다닐 수 있을까. 여전히 가보지 않은 곳은 내게 두려운 곳으로 남아있다. 초초가 이끌지 않았다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알았다한들, 내게 미지의 영역이라는 이유로 가보지 않았을 것이다. 두려움도, 짐도, 경계도 모두 내려놓고 중년의 부부처럼 계속해서 여행하기. 내 인생의 목표다. 횡단열차 여행의 첫 번째 행운은 중년의 한국인 부부와 잠시동안의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 아닐까. 작게 존재했던 두려움을 지우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감정을 심을 수 있었으니, 내가 만난 큰 행운이라 말하고 싶다.

귀여운 러시아 소녀들이 남기고 간 메시지

 야심한 시각 열차에 올랐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건지, 수많은 학생들이 기차역을 점령하고 있었고, 초초와 나는 열차가 시끄러울까 걱정했다. 기우였다. 국위 선양한 가수 BTS를 배출한 K-Culture의 나라,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이 이때만큼 기뻤던 적이 없다. 서로 소통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초초가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귀여운 러시아 소녀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K-POP을 한국인인 나보다도 더 잘 알던 귀여운 소녀.

시베리아 횡단열차 꼬리 칸

 설국열차의 꼬리 칸이 현실이 된다면, 이것과 비슷할까? 이것보다 더 남루하겠지. 설국열차는 생존이지만,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낭만이다. 적어도 내게는. 이리 갑갑해 보이는 열차에서 무슨 낭만을 찾느냐 묻는다면, 그냥 그 순간이 너무나 비일상적이어서 애틋해서 특별해서. 그럼에도 이곳은 일상의 공간이었다. 남편과 싸우고 나와 눈을 마주친 건너편 침대 아줌마가 나를 향해 활짝 웃는다. 나도 따라서 활짝 웃는다. 타인의 잠시간의 삶을 엿보고, 같이 웃다니. 난 여기서 따스함을 느꼈다. 말이 안 통하는 이곳에서 그냥 서로의 미소로 괜찮아? 괜찮아. 말하는 것 같았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괜찮다.

 횡단열차를 타면 가장 좋은 점이 삶이 단순해진다는 것이다. 열차에 오른 순간부터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게 된다. 시간을 확인하는 순간은 오로지 정차 역. 해가 지면 눈을 감고, 해가 뜨면 눈을 뜨고, 꼬르륵 소리가 나면 밥을 먹고, 기차가 멈추면 잠시 바람을 쐬며 움직인다. 언제 이런 시간을 살아볼까. 그 순간이 소중했다. 기차에서 달리 할 것도 없다. 생각보다 많이 흔들리는 열차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눈으로 좇을 뿐.

 바이칼 호수가 나타나면 열차에 있는 모든 이들이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 모아졌던 그 때를 잊지 못 한다. 내 손으로 만질 수 있을만큼 가까이에서 본 바이칼 호수보다 멀리서 스치듯 본 열차에서의 바이칼 호수가 더 그립다. 우리는 모스크바까지 한 번에 가지 않고, 횡단열차를 두 번 탔다. 바이칼 호수를 우리 손으로 잡아보려 중간 지점인 이르쿠츠크에서 내렸기 때문이다. 열차를 타고 나흘, 드디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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