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퇴근길은 허기와의 싸움이다. 점심도 든든하게 먹었겠다, 업무 시간 중간에 팀원들과 간식거리도 먹었겠다. 배가 고플 이유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오늘부터 나에게 맡겨진 해외시장조사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지 배가 너무 고프다. (나는 스트레스를 꼭 먹는 것으로 푸는 경향이 있다.)
마침 집에 쌀과 라면도 다 떨어져 마트에 가서 장을 봐야 하는 시기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장을 보고 집에 가서 뭐든 해 먹었을 것이지만 오늘은 도저히 버틸 수 없다.
“뭐든 사 먹고 장을 보자...”
무엇을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걷는다. 그러다 저 맞은편에 40년 전통의 가마솥 국밥 식당이 보인다. 지금도 가마솥에서 뿌연 육수를 펄펄 끓이고 있는지 식당의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하늘 위로 치솟아 구름이 되려 하고 있다. 고소한 냄새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오늘 저녁식사는 여기로 정했다.
“이모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내가 이 식당을 처음 방문한 지가 언제인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 식당 인테리어를 새로 해서 모든 게 바뀌었지만 국밥집 이모만큼은 그대로다. 정갈하게 만 파마머리, 사골 국물 같이 뽀얀 피부, 뽀얀 피부와 상반되는 험한 손. 국밥집 이모를 나타내는 시그니쳐 같은 것이다.
많이 피곤하고 배가 고팠지만 인사만큼 만이라도 할 수 있는 만큼 밝게 하고 싶었다.
“아이고, 오랜만이네. 취직했는가?”
이모는 내가 정장을 입고 온 걸 보자마자 달려 나와 등을 토닥거리며 물었다.
“네네 잠실에 있는 무역회사에 취업했어요.”
“출세했네 우리 연우~ 부모님이 엄청 좋아하시겠어~ 이제 좋은 짝 만나서 장가만 가면 되겄네!”
그러곤 이모는 주방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5분도 안 되어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밥이 나온다. 주문을 안 했지만 뜨끈한 돼지국밥 한 그릇과 순대 한 접시가 나왔다.
“순대는 취업 턱. 어여 먹어.”
“네, 잘 먹겠습니다.”
수저를 꺼내면서 차분하게 먹을 준비를 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나만의 순서가 정해져 있다. 먼저, 국에다가 새우젓을 양껏 넣고 다대기를 한 숟갈 정도 푼다. 그런 다음 부추를 왕창 넣은 다음 국물 맛을 꼭 한 숟가락 봐야 한다.
“키야~이 맛이지.”
국밥을 먹을 땐 조금 아저씨 같긴 해도 꼭 이 리액션을 해줘야 한다. 그러고 간이 맞으면 소면을 잘 풀어 한 젓가락 한 다음 소면을 약간 남기고 밥 한 공기를 다 말아서 먹는다. 10년 이상을 이렇게 먹고 있으니 이 정도면 특허를 내도 통과할 것이다. 눈 깜짝할 새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나니 배가 너무 부르다. 또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아~ 살 것 같다.”
나는 사실 ‘혼밥’을 그렇게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취업을 하고 나서 퇴근 후 혼자 먹는 국밥 한 그릇 때문에 ‘혼밥’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시간만큼은 온전히 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시간이다. 어쩌면 세상 행복은 국밥 한 그릇에 다 담겨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현대인이라면 필수인 ‘역류성 식도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술과는 천적이다. 그래서 술을 끊었지만, 만약 내가 이 국밥 한 그릇과 함께 소주를 한잔할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지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것이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내 배를 쳐다보니 신선이 따로 없다.
“이모, 계산요.”
“그려”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 또 올 게요.”
입구를 나오면서 괜히 뒤를 한번 돌아본다. ‘40년 전통의 가마솥 국밥’이라 적힌 촌스러운 글씨체 바로 옆에는 이모의 증명사진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나는 8000원에 국밥을 사 먹은 것이 아니라 행복을 산 것이라 굳게 믿으며 오늘의 지출이 타당했음을 나 스스로 상기시킨다.
이제 장을 보러 가야 한다. 귀찮지만 소화는 시켜야 되니 겸사겸사 장을 보고 집에 가야지. 오늘 운동은 장 보는 것으로 대체할 생각이다. 마트까지 걸어가는 길에 줄지어 있는 상가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도로변에 일정하게 세워진 가로등만이 내 길을 비춰주고 있다.
+++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부산에서 일하는데 서울을 배경으로 글을 쓰고 있어요 :) 그래서 사실은 서울에 맛있는 국밥집이 어디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해요...^^;; 독자님들의 서울 맛집 리스트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꼭!! 방문해볼까 합니다!!! 저 사담의 인생 국밥 리스트도 공유드리니 꼭 가보시면 좋겠습니다.^^
[사담 작가의 인생 국밥 리스트]
더도이 종가집 돼지국밥 본점 (부산시 덕천동)
쌍둥이 돼지국밥 본점 (부산시 대연동)
형제돼지국밥 (부산시 대연동)
수라국밥 경성대점(부산시 대연동)
알천순대곱창전골전문점 본점 (부산시 대연동)
영진돼지국밥 (부산시 대연동)
가야공원돼지국밥 부산대점 (부산시 금정구)
[사진 & 이미지 출처] MinUK, HA @ha_r_u_247 / 김유인, @studio_yoos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