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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산 Oct 15. 2021

[10/15] 오, 부디 김밥지옥

Nina Simone - Feeling Good

석준 오빠가 고백 예고장을 날렸다. 어느 늦가을 하교 길에 별안간 도서관에서 달려 나와 밤길이 추울 거라며 굳이 지오다노 검은색 가디건을 입혀줬을  도망갔어야 했다. 아니, 경상도 남자의 가오에 걸맞지 않은 석준 오빠의 아담한 체구 탓에 그의 가디건이 뇌내 망상과 다르게 나의 어깨에    그는 포기했어야 했다. 서울시 마포구 노른자 땅에 서서 서울 남자들은 전부 가식적인 능구렁이들이며 경상도 남자들만이 순정이라  튀기며 이야기할  "저는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으로 경상도 남자들을 역사적 근거로 싫어합니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젠장,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나는 이런 엔딩을 맞이할 업보를 착실히 쌓아왔다.


석준 오빠는 나보다 8살 많은 동아리 선배이다.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들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에 알러지가 있지만 무시무시한 한국의 대학 동아리 사회 속 규율은 나의 알러지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나는 꼼짝없이 만 20세부터 만 60세까지의 남성 집단을 전부 '오빠'라고 호명해야 하는 비극을 맞이했다. 그렇게 김석준 씨는 석준 오빠가 되어버렸고 그는 염치도 없이 자신보다 8살 아래인 갓 스무 살이 된 여자에게 고백을 하려 한다.


나는 필사적으로 레즈비언인 척했지만 경상도 남자의 머릿속에 '레즈비언'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아 철저하게 실패했다. 혼자인 나, 그리고 나 자신만을 너무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연기도 도전했지만 석준 오빠에겐 그저 자신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는 기특한 스무 살 여자로 보인 모양이다. 도망칠 곳 없어진 나는 마지막으로 눈치를 청나라 보부상에게 떨이세일로 넘겨버린 사람 마냥 그의 호의에서 어떤 암시도 읽어내지 못하는 여자 연기를 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그의 메시지는 "하... 이래 답답해 우야노. 내일 직접 말로 해야겠다ㅋ 내일 저녁 7시에 후문에서 보자." 핸드폰을 극적으로 마포대교 위에서 던져버릴까? 그러면 새로 핸드폰을 사야 하는데 그럴 돈이 없다. 젠장. 와중에 메시지는 읽어버렸다. 내가 핸드폰을 불태우든 밟아 뭉개든 내일 7시에는 후문으로 나가야 한다. 그렇게 오늘이 되어버렸다.


석준 오빠는 당당한 남성의 걸음걸이로 김밥천국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젠틀하게 수저를 꺼내 주며 먹고 싶은 메뉴를 다 사 줄 테니 마음껏 고르라 했다. 나의 입맛은 어제 받은 메시지와 함께 한강으로 다이빙한 지 오래였고 석준 오빠는 날 위해 소고기 김밥을 주문했다. 그는 자랑스럽게 카드를 내밀며 나를 한번 슥- 보더니 "결제해주세요"라는 멘트까지 날렸다. 젠장, 젠장, 밥까지 '얻어먹었'으니 그는 고백을 할 것이다. 별안간 그는 학교로 돌아와 잔디밭에 잠깐 앉자고 했다. 올 것이 왔다.


"니 알고 있었제? 내 오늘 뭔 말 할라는지. 니는 스무 살인데도 정신연령이 높아서 나랑 만날 자격이 있다."


앗, 김석준과의 연애 자격시험은 응시한 적도 없는데...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한 수백 가지 개 같은 고백 멘트 시뮬레이션에서 완벽히 어긋난 멘트였다. 자... 자격? 나는 시뮬레이션에 맞춰 준비해놓은 적절한 거절 멘트를 날리지 못했다. 고백 시뮬레이션 오류로 인하여 진심 바이러스가 튀어나와버렸다.


"제... 제 의사는요? 제 의사는... 없나요?"


바이러스를 감지한 나의 본체는 잔디밭에서 일어나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석준 오빠는 당황한 얼굴로 뒤따라 뛰어오고 있었다. 다행히 중3까지 계주 선수를 했던 육상 실력은 극한 상황에서 알차게 발휘되어 전공관 4층까지 계단을 타고 단숨에 뛰어 올라왔다. 석준 오빠는 중간에 나를 놓친 듯했다.


김석준 씨의 위대한 고백에서 도망친 죄로 나는 김밥지옥에 떨어졌다. 동아리에서 제명되었고 남자한테 밥이나 뜯어먹는 남성편력 된장녀가 되어버렸다. 김석준 씨는 그에게 마음의 부채 조차 남기지 않기 위하여 내가 사준 김밥천국 소고기 김밥 2배 가격의 얼그레이 초코 버블티는 그새 잊었나 보다. 김밥지옥은 김밥악마가 대접하는 양고기와 위스키로 풍족하다. 최근 듣자 하니 김밥천국은 여성 인권 운동으로 인해 씨가 말라 멸망했다고 한다.


Oct. 15th of 2021


Muse, Ms.Lauryn Hill, Michael Bublé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Feeling Good을 제 개성에 맞춰 불렀다. Muse는 영국 공영방송 BBC에서 'Feeling Good' 라이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방송 PD가 매튜 벨라미(보컬)에게 BBC에서는 욕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니 절대 하지 말라는 경고를 계속 날렸다고 한다. 방송에서 욕을 단 한번도 한적이 없던 매튜는 자신을 개념없는 아티스트 취급하는 방송 PD의 말에 화가 나 라이브가 시작한 후 메가폰을 드는 소절 (Dragonflies all out in the sun~) 부터 모든 단어를 Fuck으로 바꾸어 불렀고 이는 그대로 송출되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Muse는 BBC 무대에 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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